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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침묵을 건너온 발해, 다시 우리 앞에 서다.. 이동순 시인 ‘나는 발해로 간다’ 출간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는 일에서 새로운 길은 시작됩니다.”

 

천 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발해가 시인의 언어를 통해 다시 우리 앞에 섰다. 이동순 시인이 발해의 건국과 번영, 멸망과 유민의 삶을 66편의 시에 담은 신작 시집 ‘나는 발해로 간다’를 펴냈다. 그의 24번째 시집으로, 발해의 역사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발해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나는 발해로 간다. 이동순. 실천문학.
나는 발해로 간다. 이동순. 실천문학.

시인에게 발해는 단순히 역사책 속에 남겨진 옛 왕조가 아니다. 남북국시대의 한 축으로 드넓은 대륙과 바다를 품었던 발해는 망각 속에서 희미해진 ‘정신의 지도’다. 분단 이후 좁아진 국토에서 살아오면서 우리의 역사 감각과 공간 의식 역시 작아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시인은 발해의 첫 터전인 동모산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천문령 전투와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발해의 번영을 지나 상경성과 연해주 발해 성터, 정효공주 무덤 등 발해의 흔적을 찾아간다. 대조영을 비롯한 왕과 장군들뿐 아니라 이름 없이 살아가다 역사에서 사라진 백성, 여인, 청년, 승려와 유민들의 삶에도 눈길을 돌린다.

 

이는 왕조 중심의 역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과 숨결을 복원하려는 시인의 시도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 뒤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불러내면서 발해를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살아간 삶의 공간으로 되살려낸다.

 

시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기록되지 않은 나라’다. 발해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고 수많은 사람의 이름과 언어, 삶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현실을 시적으로 응축한 작품이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너의 언어는 사라졌으나 / 너의 침묵이 내 시가 되리니”​라고 노래한다.

 

이 구절은 이번 시집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시가 역사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는 없지만, 기록되지 않은 존재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사라진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발해는 ‘잊힌 나라’인 동시에 ‘지워진 나라’다. 부서진 성곽의 주춧돌과 기와 조각, 무덤과 유물 등 희미한 흔적을 통해 사라진 시간의 목소리를 되살리려는 것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시집은 「빛의 개국」, 「산과 바다의 나라」, 「침묵의 지도」, 「잊힌 제국」, 「다시 빛나는 별들」 등 5부로 구성됐다. 건국과 번영에서 멸망과 망각으로 이어지는 발해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마지막에는 발해를 기억하고 기록한 후대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특히 제5부에서는 유득공과 박은식, 신채호, 홍범도, 안희제 등을 불러낸다. 발해의 역사를 되살리려 했던 이들과 나라를 잃은 뒤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발자취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천 년 전 발해의 기억과 근현대사의 독립운동을 이어놓음으로써 ‘잃어버렸다고 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동순이 발해에 주목한 것은 그동안 이어온 문학적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백석과 홍범도, 고려인 강제이주 등 역사 속에서 잊히거나 지워진 존재들의 삶을 꾸준히 문학으로 복원해왔다. 이번 시집 역시 그 연장선에서 발해라는 ‘잊힌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시인이 되찾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다. 발해가 사라진 뒤 그 터전은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가 됐고, 발해사의 성격과 귀속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영토의 회복보다 발해가 보여준 역사적 상상력과 정신의 크기에 주목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과연 한 나라의 옛 영토뿐일까.” 시인은 분단된 국토의 남쪽 절반에 머물러 살아온 시간이 우리의 공간 의식과 역사 감각을 좁혀놓았다고 말한다. 지역과 세대, 계층과 이념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오늘, 더 크고 넓은 세계를 바라봤던 선조들의 기상과 포부마저 잊어가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시인은 발해를 “우리가 잊고 있었던 더 큰 세계”이자 “오늘 다시 펼쳐보아야 할 정신의 지도”라고 말한다. 발해를 기억하는 일이 곧 과거를 추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찾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