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⑯로더레 에스테이트>
앤더슨 밸리 뛰어난 잠재력 간파
1982년 로더레 에스테이트 설립
스파클링 와인 산지 명성 이끌어
샴페인 양조+앤더슨 밸리 떼루아 결합
미국 프리미엄 스파클링 시장 선구자로
‘크리스탈’로 유명한 샴페인 명가 루이 로더레(Louis Roederer)에게 올해는 특별한 해입니다. 창립 250주년을 맞았습니다. 250주년을 함께 맞은 곳이 또 있습니다. 바로 미국으로 올해 독립 250주년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의 와인 산지 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는 요즘 프리미엄 스파클링 와인 생산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이곳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일찌감치 앤더슨 밸리에 진출해 스파클링 와인 전문 와이너리를 설립한 생산자가 루이 로더레입니다. 바로 로더레 에스테이트(Roederer Estate)입니다.
◆특별한 땅 앤더슨 밸리
앤더슨 밸리는 멘도시노 카운티(Mendocino County)에서도 길이 18마일, 폭 1마일 남짓의 좁고 긴 계곡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져 있으며, 128번 고속도로를 따라 약 90개의 포도밭이 흩어져 있습니다. 재배 면적은 2500에이커(약 1000ha) 남짓으로, 심을 수 있는 땅 자체가 제한적입니다. 나파 밸리처럼 커질 수 없는 대신 그만큼 특별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앤더슨 밸리는 1970년대 초 화이트 와인 산지로 출발해, 1980년대 스파클링 와인의 시대를 열었고, 1990년대 피노 누아 붐이 일면서 지금은 포도밭의 80%가 피노누아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뒤를 샤르도네와 게뷔르츠트라미너가 잇습니다. 상파뉴에서는 바로 이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가 샴페인을 만드는 주 품종입니다. 앤더슨 밸리가 고품질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스틸 와인은 물론, 스파클링 와인 산지로도 각광을 받는 이유입니다.
사실 앤더슨 밸리는 북위 약 39도로 스페인 발렌시아나 포르투갈 리스본과 비슷한 위도에 자리합니다. 반면 상파뉴는 북위 약 49도로 비티스 비니페라 포도가 자랄 수 있는 거의 북방한계선입니다. 앤더슨 밸리 위도가 훨씬 낮지만 상파뉴와 비슷한 서늘한 기후를 유지하는 건, 알래스카 해류 덕분입니다. 태평양을 타고 남하하는 이 한류가 거대한 천연 냉각 장치 역할을 하면서 해안가를 서늘하게 유지해주는 덕분에, 위도상으로는 따뜻해야 할 이 지역이 스파클링 와인 산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바로(Navarro) 강을 타고 들어오는 짙은 안개도 한몫합니다. 안개는 아침이면 계곡을 채웠다가 오전 9~10시 무렵 걷히고, 오후 3시경이면 내륙의 더운 공기가 상승하며 만들어내는 바람이 다시 서늘한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낮과 밤의 기온 차는 여름 한낮 최고 섭씨 33도에서 새벽 6도 안팎까지 떨어져, 하루 사이 26도 가까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일교차는 포도가 익는 속도를 늦춰줍니다. 당도만 급격히 오르는 것을 막고 신선한 천연 산도를 그대로 지킨 채 아로마와 미네랄 풍미를 천천히 쌓아 올릴 수 있도록 합니다. 상파뉴나 부르고뉴가 대륙성 기후로 외부 영향에서 비교적 차단돼 있다면, 앤더슨 밸리는 태평양에 인접한 해양성 기후가 만들어내는 이 극단적인 일교차 자체가 와인의 개성을 규정하는 셈입니다. 이런 기후 덕분에 앤더슨 밸리의 스파클링 와인은 프랑스 상파뉴 특유의 날카로운 미네랄감과 높은 산도를 닮았으면서도,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살이 준 조금 더 풍부한 과실미가 결합된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실제 상파뉴와 앤더슨 밸리는 포도 재배 기후 분류인 ‘윙클러 스케일(Winkler Scale)’에서 가장 서늘한 ‘리전 1(Region I)’에 속합니다. 이는 와인 산지의 기후(누적 온량)를 측정해 지역 5개로 분류한 지표입니다. 공식 명칭은 윙클러 지수(Winkler Index) 또는 적산온도 지수(Heat Summation)라고도 부릅니다. 1940년대 미국 UC Davis의 앨버트 윙클러(A.J. Winkler)와 메이너드 애머린(Maynard Amerine) 교수가 어떤 기후에서 어떤 포도 품종을 심어야 가장 좋은 와인이 나오는지를 과학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앤더슨 밸리는 엄격한 지역 개발 제한법과 자연환경 보존 정책의 규제를 받습니다. 따라서 대규모 상업 와이너리나 화려한 관광 시설은 들어설 수 없었고, 대부분 20에이커 미만의 소규모 가족 경영 포도밭으로 남았습니다. 대량 생산이 아닌 소량 고품질의 전통 방식 스파클링 와인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디캔터(Decanter) 같은 유명 매체가 앤더슨 밸리 스파클링 와인에 90점대 중반의 점수를 잇달아 매기며 주목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닻 내린 루이 로더레
인디언 크릭 파크(Indian Creek Park) 인근, 필로(Philo) 마을에 자리한 로더레 에스테이트에선 샤르펜베르거 셀러스(Scharffenberger Cellars), 라이켄 에스테이트(Liken Estate)가 함께한 특별한 시음 행사가 열려 앤더슨 밸리 스파클링 와인의 매력을 한껏 뽐냈습니다. 캘리포니아와인협회가 ‘회복력 있는 미래(Resilient Future)’를 주제로 진행한 미디어를 위한 행사입니다.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로더레 에스테이트의 수석 부사장 겸 와인메이커 아르노 바이리히(Arnaud Weyrich) , 라이켄 에스테이트의 오너이자 와인메이커이며 앤더슨밸리와인그로워스 협회장 더그 스튜어트(Doug Stewart), 샤르펜베르거 와인메이커 제프리 진드라(Jeffrey Jindra), 앤더슨밸리와인협회 전무이사 코트니 드그라프(Courtney DeGraff)가 반갑게 일행을 맞이합니다.
코트니 전무는 앤더슨 밸리가 왜 특별한지 설명합니다. “1983년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미국포도재배지역)로 지정된 이 아름다운 앤더슨 밸리는 폭이 1마일에 불과하고 길이 15마일에 포도 재배 면적은 2500에이커 남짓입니다. 나파 밸리처럼 더 커질 일이 없고 작기 때문에 특별합니다. 접근하기 쉽지 않은 길 때문에 정말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만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곳엔 앤더슨 밸리에 헌신하고, 늘 서로 함께해주는 멋진 가족 같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호등도, 대형 은행이나 마트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서로 돕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앤더슨 밸리는 1970년대 초 화이트 와인으로 시작해 1980년대 스파클링의 시대를 열었고, 1990년대엔 피노 누아 붐이 일었습니다. 1981년 피노누아는 약 8% 정도에 불과했어요. 샤르도네(약 30%), 리슬링(약 17%), 게뷔르츠트라미너(약 17%)가 주력이었는데, 지금은 피노 누아가 약 70%에 달할 정도로 피노 누아를 압도적으로 많이 재배하고 2위가 샤르도네로 약 17%를 차지합니다. 두 품종은 샴페인을 만드는 주력 품종입니다. 그만큼 앤더슨 밸리는 스파클링 와인에 최적화돼 있다는 뜻입니다. ”
로더레 에스테이트의 역사는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샴페인 루이 로더레의 대표 장 클로드 루조(Jean-Claude Rouzaud)가 나파 밸리나 소노마 대신 앤더슨 밸리를 낙점하고 이곳에 직접 에스테이트를 세웁니다.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로서는 이례적인 결정입니다. 로더레는 포도 재배, 양조, 오크통 숙성한 리저브 와인 활용 등 샴페인의 철학을 그대로 로더레 에스테이트에 가져옵니다. 다만 이를 그대로 베끼지 않고, 이곳의 떼루아에 맞게 재해석해 앤더슨 밸리 스파클링 와인의 명성을 이끌고 있습니다. 첫 논빈티지 브뤼는 1988년 시장에 나왔고, 이듬해인 1989년 빈티지부터는 지금의 하이엔드 프레스티지 퀴베인 레르미타주(L’Ermitage) 스타일이 완성됐습니다.
현재 로더레 에스테이트는 포도밭 620에이커(약 250ha)를 소유한 앤더슨 밸리 최대 포도 재배 생산자입니다. 현재는 장 클로드 루조의 아들인 7대손 프레데릭 루조(Frederic Rouzaud)가 루이 로더레와 로더레 에스테이트를 이끌고 있습니다. 아르노는 와인 이름에 얽힌 뒷이야기도 들려줍니다. “1980년대 로더레 가문이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수출 시장에서 ‘로더레’라는 이름이 루이 로더레 샴페인과 혼동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 안에서는 로더레 에스테이트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지만, 한국, 캐나다, 일본, 영국, 독일 등 미국 밖에서는 ‘콰르테(Quartet)’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상파뉴 양조+앤더슨 밸리 떼루아
로더레 에스테이트는 40년 동안 와인을 만들어오면서 단 두 명의 와인메이커만을 두었으며, 두 사람 모두 프랑스 출신입니다. 초대 와인메이커였던 고(故) 미셸 살그(Michel Salgues)는 샹파뉴에서 태어나 와이너리의 초기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2002년에는 알자스 출신의 아르노 바이리히가 살그의 뒤를 이어 와이너리를 이끌며, 와인 한 병에 전통과 예술성을 담아내는 로더레 에스테이트의 철학을 잇고 있습니다. 아르노 바이리히는 1993년 명문 몽펠리에의 고등 양조학 학교(Ecole Supérieure d’Oenologie)를 졸업하고 포도재배학 및 양조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로더레 에스테이트에서 인턴으로 경력을 시작합니다. 2000년 로더레 에스테이트에서 어시스턴트 와인메이커로서 다양한 양조 기술을 폭넓게 경험한 바이리히는 샴페인 루이 로더레의 개발 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거쳐 2002년 로더레 에스테이트로 돌아와 포도밭 관리부터 와이너리의 일상적인 경영까지 와이너리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로더레 에스테이트의 양조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리저브 와인’과 ‘약한 말로락틱 발효’입니다. 매해 생산량의 10~15%를 오크통에서 리저브 와인으로 숙성해 다음 빈티지 블렌딩에 사용합니다. 아르노는 이를 “샴페인 하우스의 스타일을 규정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병 숙성 기간도 평균 28개월로, 샴페인 규정상 최소 숙성 기간인 15개월을 훌쩍 넘어 빈티지 샴페인에 요구되는 최소 3년에 근접한 수준입니다. 앤더슨 밸리와 상파뉴의 결정적 차이는 산도입니다.
“상파뉴가 위도 49도에 자리해 당도가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가 오기 전에 수확하는 게임이라면, 여기서는 그대로 뒀다가는 포도가 썩어버립니다. 앤더슨 밸리는 포도 성장기가 짧아 알코올 도수 11.5% 안팎이 나오는 낮은 당도에서도 충분한 성숙도에 도달합니다. 그만큼 산도를 더 많이 머금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답니다. 말로락틱 발효는 거의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말로락틱을 거치지 않아야 신선한 풋사과 캐릭터가 살아납니다. 다만 산도가 지나치게 높았던 서늘하고 습한 빈티지에는 산미의 날을 부드럽게 다듬기 위해 일부만 진행하기도 합니다.”
◆땅과 물,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 로더레 에스테이트가 소유한 포도밭은 100% 지속가능 인증을 받았으며, 이 중 100에이커는 유기농으로 재배되고 그중 60에이커는 ‘캘리포니아 유기농 농가 인증(California Certified Organic Farmers, CCOF)’까지 받았습니다. 포도밭 전체는 피시프렌들리 파밍(Fish Friendly Farming) 인증도 획득했는데, 이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나바로강의 연어 서식지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때 벌목에 따른 토양 유실로 씨가 마를 뻔했던 연어는, 도로 개설과 토사 유출을 엄격히 관리하는 농법 덕분에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또 모든 와이너리 전력은 100% 태양광입니다. 토양에는 자체 생산한 퇴비 500t에 구매 퇴비를 더해 연간 600~800t을 포도밭에 투입하며, 주변 숲에서 나온 고사된 나무를 저온에서 서서히 태워 만든 바이오차(biochar)도 퇴비에 섞어 다시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대기 중 탄소를 안정적으로 토양에 가두는 방식입니다. 포도밭은 한 번도 갈아엎지 않는 영구 커버크롭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수도가 없는 지역 특성상 와이너리 세척수도 지하수를 끌어올려 재활용합니다.
◆로더레 에스테이트 대표 와인
로더레 에스테이트 와인은 루이 로더레를 수입하는 에노테카 코리아를 통해 한국 소비자와 만납니다.
▶로더레 에스테이트 콰르테 브뤼 로제(Quartet Brut Rosé NV)
신선한 딸기와 붉은 사과,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실 향이 주를 이루며 흰 꽃과 백도, 갓 구운 빵을 떠올리게 하는 고소한 브리오슈 향이 코끝을 스칩니다. 입안에서는 풀바디하고 둥근 질감이 먼저 다가오지만 신선하고 활기찬 산도가 곧바로 중심을 잡아주며, 마무리에는 기분 좋은 미네랄 풍미와 깔끔하고 드라이한 여운이 길게 이어집니다. 짭조름한 연어 타르타르나 구운 새우, 가벼운 염소치즈를 곁들인 샐러드와 잘 어울리며, 풍미가 풍부한 만큼 살짝 양념해 구운 오리가슴살이나 돼지고기 안심 같은 가벼운 육류 요리와도 훌륭한 궁합을 보여줍니다. 보통 피노누아 60%, 샤르도네 40%입니다. 100% 자가 포도만 사용하고 첫 번째 압착액인 퀴베(Cuvée)만 골라 쓰며, 말로락틱 발효는 진행하지 않거나 최소화해 신선하고 정교한 산도를 지킵니다. 5개 이상의 빈티지에서 모은 오크 숙성 리저브 와인을 10~20% 블렌딩해 깊이를 더하고, 최소 2년 이상 병 숙성합니다. 우아한 살몬 핑크빛을 내기 위해 피노누아 스틸 와인을 3~5%가량 마지막에 더합니다.
▶로더레 에스테이트 콰르테 브뤼(Quartet Brut NV)
잘 익은 청사과와 배, 레몬 껍질의 신선함이 먼저 드러나고, 이어 구운 헤이즐넛과 스파이시한 풍미, 갓 구운 빵의 묵직하고 고소한 이스트 향이 조화롭게 피어오릅니다. 입안에서는 부드럽게 다듬어진 크림 같은 질감이 감싸지만, 말로락틱 발효를 제한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산도가 침이 고이게 만듭니다. 농익은 과실 풍미와 짭조름한 미네랄리티가 긴 피니시로 이어집니다. 신선한 스시나 사시미, 대게·랍스터·구운 가리비 같은 해산물 요리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합니다. 높은 산도 덕분에 에그 베네딕트 같은 산뜻한 브런치 요리, 매콤한 아시안 푸드, 크림소스를 얹은 닭요리와도 잘 어울립니다. 샤르도네 60%에 피노누아 40%를 블렌딩합니다. 첫 번째 압착한 고품질 퀴베만 사용해 발효하고 셀러에서 오크 숙성한 리저브 와인을 10~15% 더해 멀티빈티지 형태로 완성합니다. 최소 2년 이상 병 숙성하며, 도자주는 8~10g/L입니다.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⑰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