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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빚을 국민에게 전가하나…일본의 인플레이션 ‘흐린눈’ [김범수의 세상만상]

빚더미 일본, 물가는 누가 잡나
아베노믹스, 뒤늦게 온 청구서
빚은 정부가, 물가는 국민이
돈 풀고 금리 올리는 일본의 역설

일본 정부가 막대한 빚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국민들에게 ‘인플레이션’을 떠넘겨 고통을 분담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은 유례없는 ‘경제 부조화’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일본은행(BOJ)은 지난 18일 기준금리를 1.00%에서 1.25%로 25bp(0.25%) 인상했습니다.

 

그림=ChatGPT 생성 이미지
그림=ChatGPT 생성 이미지

기준금리가 3.00%인 우리나라 입장에선 저 수치가 귀엽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있어서 기준금리 1.25%는 31년 만에 가장 높은 금리이자, 최후의 보루 같은 성격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번 기준금리 인상이 의도대로 잘 되지 않을 경우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인 다카이치 사나에마저 임기를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준금리로 인한 일본 경제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베노믹스 ‘복붙’하려는데…세상이 바뀌었다

 

26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지난 18일 기준금리를 1.25%로 25bp 인상했습니다. 무려 31년 만에 가장 높은 금리죠. ‘제로금리’의 나라인 일본에 있어선 다소 이례적인 상황입니다. 특히 이번의 금리인상은 다카이치 내각의 경기부양 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죠.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전후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를 자청하면서 아베노믹스를 계승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아베노믹스는 쉽게 말해 기준금리를 낮춰 시장 내 자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국가도 적극 채권을 발행해 경기를 부양하는 구조입니다.

 

그림=ChatGPT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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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아베노믹스로 일본 경제는 약간의 재미를 봤습니다. 낮은 금리와 양적 완화로 경기는 일시적으로 호황이었죠. 1980년 대 말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시작된 ‘잃어버린 20년’이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커졌습니다. 아베 내각의 후반부인 2016년 당시 일본의 기준금리가 ‘마이너스’ 였다니, 아베노믹스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베노믹스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금리를 낮추고 채권을 발행한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당시 전 세계가 저금리 기조에 빚을 내 투자하는 양적완화 기조였죠. 모두가 다 같이 할 때 따라가는 건 리스크가 비교적 작습니다.

 

하지만 아베 내각때와 달리 다카이치 내각의 상황은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이 시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기준금리를 인상에 나섰죠. 한국의 기준금리가 최근 3.00%로 인상된 것이나, 미국의 기준금리가 4.00%으로 인상한 것 역시 ‘물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일본 역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9%를 기록했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사회에 있어서 ‘쇼크’나 다름없습니다. 일본은 1980년대 말 버블경제가 무너진 이후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을 장기간 경험하던 나라였습니다. 일본 근로자 급여도 1990년과 2026년 차이가 없을 정도죠. 이런 경제 구조에서 물가가 오른다면 근로자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쉽게 말해 물가가 오를수록 가난해지는 것과 다름없죠.

 

그림=ChatGPT 생성 이미지
그림=ChatGPT 생성 이미지

◆금리 버튼을 눌렀더니…1300조엔짜리 ‘청구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올려서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중앙은행의 근본적인 역할이죠.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흐린눈’으로 외면하고 있죠.

 

일본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베노믹스라는 잔치 때문에 발행된 ‘청구서’ 때문입니다. 바로 일본의 막대한 ‘빚’ 입니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약 1300조엔(1경1220조원)을 상회합니다. 무려 국가총생산량(GDP)의 약 207% 수준이죠. 앞서 말한 것처럼 아베 내각에서 국채를 찍어내며 양적완화를 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가부채는 급증했죠.

 

기준금리가 올라가면 정부가 지불해야 하는 이자비용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올해 일본이 지불해야 할 이자비용은 13조엔(122조원)에 달합니다. 이는 전년보다 2조5000억엔 늘어난 수치죠. 내년에는 부담이 더 커질 전망입니다.

 

더 문제는 다카이치 내각은 경기부양을 위해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하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당장 일본의 2027 회계연도 정부 예산안은 143조1000억엔으로 올해 122조3092억엔보다 약 21조엔 늘어났습니다. 다카이치 내각의 논리는 빚이 많다고 긴축을 하는게 아니라 국가 GDP를 늘려 부채 비율을 줄이자는 겁니다.

 

영국 총리 역사상 '최단기'라는 불명예를 받은 리즈 트러스 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총리 역사상 '최단기'라는 불명예를 받은 리즈 트러스 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여기서 경제적인 역설이 생기게 됩니다. 다카이치 정부가 국채를 더 발행하겠다고 하면, 채권의 공급이 많아지면서 국채가격은 떨어지게 됩니다. 채권의 가격과 금리는 반대로 돌아가죠. 국채가격의 하락은 자연스럽게 금리인상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일본 정부의 이자비용이 더 늘어난다는 소리죠.

 

게다가 일본은 인플레이션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기준금리 인상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미국이죠. 미국은 일본 엔화의 가치가 낮은 걸 달가워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에서 불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장관이 최근 “일본은행은 적절한 통화정책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는 등, 일본의 기준금리 인상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죠.’

 

결국 기준금리는 올라가는데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양적완화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2022년 영국 총리로 취임했던 리즈 트러스가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서 44일만에 사임하면서 영국 역사상 최단기 총리라는 불명예를 받은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빚은 정부가 졌는데…이자는 국민이 내는 구조

 

의외로 일본 정부는 기준금리를 적극 인상하지 않고 국채를 발행하는 양적완화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면 인플레이션은 사실상 묵인하는 건데요. 보통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묵인하면 얼마지나지 않아서 정권이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보면 일본 정부는 ‘일정기간’ 인플레이션을 국민들에게 감내시킬 자신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금리를 올려 이자비용을 더 내는 대신, 인플레이션으로 이자를 국민들에게 분담하는 발상이죠.

 

일본은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가 다른 나라입니다.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갈등 보다는 조화, 반발 보다는 순응이 더 익숙한 나라죠. 이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2차 대전 직후에 저술한 ‘국화와 칼’에서 잘 드러납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자살 특공대인 ‘카미카제’, 전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려는 ‘1억 총옥쇄’ 같은 개인을 국가를 희생시키는 문화가 비교적 만연해었죠.

 

오늘날에도 그 정도가 적을 뿐 개인이 국가에 충성을 넘어 희생하는 건 기저에 깔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일대 농산물이 팔리지 않았을 때 ‘먹어서 응원하자’는 신박한(?) 국가주의적 개념도 나왔죠.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후쿠시마 농산물을 먹어서 응원하자' 포스터, 할복 문화,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 2차대전 당시 전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1억 총옥쇄' 훈련.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후쿠시마 농산물을 먹어서 응원하자' 포스터, 할복 문화,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 2차대전 당시 전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1억 총옥쇄' 훈련.

일본 경제에서는 특히 ‘재정지배’라는 개념이 강합니다. 재정지배란 정부부채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을 추진하는데 제약을 받는 상황을 뜻하죠. 일본은행(BOJ)의 행보를 보면 인플레이션을 보고 금리를 결정하는지, 일본 정부의 빚을 보고 금리를 결정하는 지 모호한 구석이 많습니다.

 

보통 시장은 정직하게 반응합니다.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엔화의 가치는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지난 18일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렸을 때 엔화는 오히려 더 떨어졌습니다. 왜일까요?

 

어쩌면 시장은 일본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준금리를 하지 않을 거라 베팅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인플레이션의 고충을 국민들에게 분담시키고, 빚을 더 늘리는 양적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할 거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죠.

 

다카이치 내각의 역설적인 경제정책 결말은 아직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기대하는 GDP 상승을 이루지 못했거나, 예상과 달리 물가가 너무나 급하게 오르거나, 국민의 분노 임계점이 넘어가버릴 경우 일본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