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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진미에 명의까지 있었는데’…조선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한 이유

조선 왕 27명 평균 사망 연령 46세…영조 82세·세종 53세
기름진 음식·운동 부족·스트레스 등이 건강에 ‘악영향’
현대 의학 연구에서도 건강한 식사의 중요성 확인
조선시대 왕들은 산해진미와 푸짐한 식사를 하고 당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았지만, 평균 수명은 46세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존대왕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조선시대 왕들은 산해진미와 푸짐한 식사를 하고 당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았지만, 평균 수명은 46세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존대왕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조선시대 왕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음식과 의료서비스를 누렸다. 왕의 건강은 곧 국가의 안위와 직결됐고, 몸에 이상이 생기면 내의원을 비롯한 의료진이 치료에 나섰다.

 

이렇듯 산해진미 등 풍족한 식사와 최고의 의료진을 곁에 뒀음에도 왕들은 기대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관련 연구를 종합하면 조선 왕들의 평균 사망 연령은 46~47세 수준으로, 국가유산진흥원이 기존 연구와 사료를 토대로 정리한 자료에서도 조선 왕 27명의 평균 사망 연령은 46.0세였다.

 

왕들의 짧은 수명을 단순히 음식이나 생활습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감염병과 당시 치료하기 어려웠던 질환, 정치적 사건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만 왕들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식습관과 운동 부족, 스트레스가 건강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 최고의 의료진 곁에 두고도…세종 괴롭힌 ‘소갈’과 눈병

 

조선 왕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은 영조로 82세까지 살았다. 뒤이어 태조(73세), 광해군·고종(66세), 정종(62세), 숙종(59세) 등이 비교적 오래 살았다. 반면 예종(19세), 헌종(22세), 인종(30세) 등은 일찍 생을 마감했다.

 

왕의 건강을 관리하는 내의원이 있었지만 질병은 왕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왕들이 각종 질환으로 고생한 기록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왕의 건강을 관리하는 내의원이 있었지만 질병은 왕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사진은 왕의 식사인 수라상의 일부. 게티이미지뱅크
왕의 건강을 관리하는 내의원이 있었지만 질병은 왕이라고 피해 가지 않았다. 사진은 왕의 식사인 수라상의 일부. 게티이미지뱅크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이다. 세종은 5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소갈을 비롯해 눈병과 허리·등·다리 통증 등 여러 질환에 시달렸다.

 

세종은 재위 21년인 1439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설명하면서 소갈 증상이 생긴 지 10여 년이 됐고 눈까지 나빠졌다는 취지로 말했다. 소갈은 심한 갈증과 잦은 소변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 의학상의 병증으로 현대의 당뇨병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당시 혈당을 측정할 방법이 없었던 만큼 세종이 현대적 의미의 당뇨병을 앓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눈병도 심각했다. 실록에는 세종의 눈이 어두워져 가까이 있는 사람을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세종에게 당뇨병과 관련한 합병증이나 관절질환 등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해왔다.

 

◆ 기름진 음식에 운동 부족까지…영조·숙종은 ‘죽’으로 몸 관리

 

왕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음식뿐 아니라 생활습관과 정신적 스트레스도 거론된다.

 

2020년 한국외식산업학회지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토대로 조선 전기 왕들의 질병과 사망을 분석한 결과, 음식과 함께 성격과 생활습관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후 조선 중기 왕들까지 분석 대상을 넓힌 연구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제시됐다.

 

연구팀은 조선 왕들이 풍족한 식생활을 누렸지만 기름진 음식과 운동 부족, 국정 운영 과정에서의 과도한 업무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건강에 불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이 기름진 음식에 대한 식욕과 과식으로 이어지고, 이런 생활습관이 질병과 수명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의학에서도 지나치게 풍족한 식사를 경계했다. 세종 때 편찬된 의서 ‘향약집성방’에는 소갈과 관련해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먹는 것이 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반대로 장수한 왕들은 음식으로 몸 상태를 관리한 기록도 남겼다. 82세까지 살았던 영조의 승정원일기에는 죽과 관련한 기록이 2033건 확인된다. 갈근죽, 녹두죽, 연자죽, 율무죽, 타락죽, 흑임자죽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들 죽은 단순한 식사에 그치지 않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음식으로 몸을 다스리는 ‘식치’의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59세까지 살았던 숙종 역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죽을 자주 먹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즐겨 먹은 약죽과 관련한 기록만 89건에 달한다.

 

수백 년 뒤 현대인을 장기간 추적한 연구에서도 '균형잡힌 식사의 중요성'이 입증됐다. 사진은 한식 한상. 게티이미지뱅크
수백 년 뒤 현대인을 장기간 추적한 연구에서도 '균형잡힌 식사의 중요성'이 입증됐다. 사진은 한식 한상. 게티이미지뱅크

◆ 수백 년 뒤 현대 연구도 같은 결론…“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

 

왕들의 식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건강과 음식의 관계는 현대인을 대상으로 한 장기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미국인 11만9315명을 최장 36년간 추적해 평소 식습관과 사망 위험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를 2023년 국제학술지 ‘JAMA Internal Medicin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미국 식생활 지침에 맞춘 식사, 지중해식 식단, 건강한 식물성 식품 중심 식단, 통곡물·채소·과일 등 질 좋은 음식을 많이 먹고 붉은 고기와 당류 섭취를 줄이는 식단 등 네 가지 식사 방식을 평가했다.

 

그 결과 건강한 식사 원칙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가장 덜 지킨 사람들보다 전체 사망 위험이 14~20% 낮았다. 심혈관질환과 암, 호흡기질환으로 인한 사망에서도 건강한 식사를 한 사람들에게 대체로 유리한 연관성이 나타났다.

 

연구팀은 특정 식사법 하나를 정답으로 삼기보다는 각자의 음식 문화와 취향에 맞는 건강한 식사 패턴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 왕들의 기록과 현대인의 장기 추적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음식의 양이나 가격보다 식사의 균형과 생활습관이 건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몸 상태에 맞춰 식단을 조절하고 꾸준히 움직이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