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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자(들)’ 역사 왜곡 논란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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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초 태어난 필자는 어머니로부터 “너 낳아 놓고 텔레비전(TV) 앞에서 울던 기억밖에 안 난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해 8월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 행사 도중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서거한 사건 때문이다. 피격 직후 서울대병원에 이송된 육 여사는 긴급 수술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뒀다. 5일간의 국민장(國民葬)이 선포된 가운데 8월19일 엄수된 영결식 및 안장식은 TV로 중계돼  국민을 울음 바다에 빠뜨렸다. 박근혜(전 대통령) 등 세 자녀가 국립묘지에서 고인에게 마지막 묵념을 올리는 사진을 지면에 실은 어느 일간지는 “자녀들의 애잔한 흐느낌에 국립묘지도 오열하는 듯했다”는 비통한 설명을 달았다.

1974년 8월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당시 괴한의 저격으로 행사장이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모습.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이 단상 위로 뛰어올라 추가 피격을 막는 가운데 오른쪽으로 총에 맞아 쓰러진 흰색 한복 차림의 육영수 여사가 보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74년 8월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당시 괴한의 저격으로 행사장이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모습.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이 단상 위로 뛰어올라 추가 피격을 막는 가운데 오른쪽으로 총에 맞아 쓰러진 흰색 한복 차림의 육영수 여사가 보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올해 3월11일 정치근 전 법무부 장관이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두환정부 시절인 1981년 당시 부산지검장이던 정 전 장관이 고검장도 안 거치고 검찰총장으로 발탁됐을 때 법조계의 충격은 엄청났다. 그는 총장이 된 이듬해인 1982년 이번에는 법무장관으로 승진했으니 ‘관운이 엄청나게 좋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인다. 검찰 시절 공안통 검사로 명성을 떨친 정 전 장관의 부고 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력은 그가 육 여사 저격 사건 전담 부장검사였다는 점이다.

 

사건 당일 재일교포 문세광(당시 22세)이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정치근 부장검사는 1974년 9월 문을 살인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1심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같은 해 10월 결심공판이 열렸다. 정 부장검사는 문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한여름의 총성은 가시고 이제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부는 이때 고(故) 육 여사의 유덕(遺德)을 잊지 못해 참배객이 국립묘지에 있는 묘소에 지금도 줄을 잇고…”라고 울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에 방청객들도 눈물을 흘렸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 1974년 12월17일 대법원은 문에 대한 1·2심의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문은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진범인 문세광이 교도관들에 의해 호송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나는 육 여사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진술해 원래 목적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음을 내비쳤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진범인 문세광이 교도관들에 의해 호송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나는 육 여사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진술해 원래 목적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음을 내비쳤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육 여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진범은 문이 아니고 박 대통령 등 대한민국 정부라는 영화의 암시에 분통을 터뜨리는 이가 많다. 영화 제작진은 1989년 모 잡지를 통해 “육 여사는 문세광이 쏜 총탄에 죽지 않았다”고 주장한 전직 경찰관 이건우(1999년 별세)의 진술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는 언론 인터뷰에서 ‘육 여사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누가 쏜 것인지 알려면 탄두를 회수해 총 임자를 가려야 하는데, 대통령 경호실이 이례적으로 탄두를 모두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는 취지로 말했다. 영화적 상상력 발휘야 나무랄 수 없겠으나, 이미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난 사안의 결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