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참으로 묘하다. 길 가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싸해지고, 까마득히 잊고 지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살면서 희미해진 ‘사랑’과 ‘우정’이라는 단어가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자꾸 우러르게 만든다. 아름답고 그윽하게 물드는 나뭇잎들. 그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꽃처럼 낙화하는 모습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가을 속에 서 있으면서도 가을이 못 견디게 그리워져 자연이,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웠나, 감탄하게 만든다.
그래도 가을이 주는 쓸쓸함과 고독, 존재론적 고뇌 등은 가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특혜고 정취라서 나는 대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박인환 탄생 100주년 기념/ 박인환의 삶과 시 읽기/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에 참석했다. 가을의 시라면 누가 뭐래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 최고이니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봄의 시로 최고이듯이.
행사 제목으로 쓴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는 박인환의 시 ‘가을의 유혹’에 나오는 시구다. 그 시구만으로도 가을이랑 정말 잘 어울린다. 마치 박인환이 우리를 깊은 가을의 심연 안으로 유혹하는 듯. 행사장인 JCC크리에이티브센터로 들어서니 이곳도 가을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제라도 이런 자리가 많아지고, 그의 문학이 여기저기에서 재조명되고 있다는 건 정말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들이 누구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19와 5·18을 겪어낸 사람들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김수영이 아무리 박인환을 폄하, 얕보듯 해도 나는 한 번도 그 둘의 시를 비교한 적이 없다. 그 둘은 진짜 최고의 시인들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 끝난 폐허의 시대, 야만의 시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 암흑 세상에서 자기만의 낭만을 잃지 않고 ‘명동백작’ ‘댄디 보이’로 하루하루를 버텨낸 박인환에게는 꼭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는 그도 힘들면서 누구에게나 인색하지 않았고, 넓고 따뜻한 인성과 심장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나는 천년의 세월을 지나온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보들레르의 시구가 떠오를 정도로 그는 우리 문단사에 참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남기고 떠났다.
180㎝의 헌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좋아하고, 스물한 살에 시인으로 등단해 딱 10년을 멋진 시인으로 살다가 떠난 박인환 시인. 그가 명동 거리를 누비며 술잔을 앞에 놓고 ‘목마와 숙녀’ 혹은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낭독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겨우 서른밖에 살지 못한 그의 삶과 문학에의 열정과 고뇌, 세계 문학을 향한 열린 시각 등이 너무 아깝고, 마음이 아파서. 그는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시로써 이 사회와 싸웠다”고 말한 그대로 그렇게 한 시대를 살다 갔다. 문화적 양아치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전방위적 탈식민 시인으로서!
김상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