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의 경험은 통계나 연구가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정책의 빈틈을 드러낸다. 영국에서 자살 유족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지원 체계와 정책을 움직여온 배경이다.
자살 사별과 자살 예방을 연구해온 알렉산드라 피트만(사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교수는 세계자살예방의 날을 하루 앞둔 9월 9일(현지시간) 연구실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유족들의 1인칭 경험을 직접 듣는 것은 정책 결정자들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정책 결정자들은 연구자에게 ‘누가 자살 위험이 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하지만 연구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결과가 현장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유족은 자신이 겪은 지원의 공백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다. 연구 설계부터 결과 해석까지 자살 유족 당사자를 참여시켜 온 피트만 교수는 “영국에서는 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지원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분명하게 말해왔다”고 했다.
영국의 민간 자살 예방·유족 지원단체들은 정부 서비스의 공백에서 출발했다. 피트만 교수는 “정부에서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아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곳이 많다”고 했다. 이후 당사자와 가족들이 만든 지원이 공공정책과 결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여러 자살 사별 지원단체를 잇는 ‘서포트 애프터 수어사이드 파트너십’이다. 개별 단체의 목소리를 모아 정부와 소통했고, 잉글랜드 각 지역에서 지방정부가 지역 민간단체에 예산을 지급해 자살 사별 지원을 맡기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데 역할을 했다. 피트만 교수는 이러한 지역 민간단체의 지원이 전문 의료기관보다 자살 유족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울 수 있다고 봤다. 사별 자체를 질병처럼 병리화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트만 교수는 유족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지는 과정도 연구해왔다. 그는 자살을 둘러싼 유족의 논의를 위축시키는 근거로 흔히 쓰이는 ‘자살 전염’이라는 표현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감염병은 병원체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 수동적 과정이지만, 자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자살을 접한 사람은 죽음뿐 아니라 이후 주변의 반응과 추모, 자신의 처지와 경험을 함께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그렇다고 모든 유족에게 공개적으로 경험을 말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피트만 교수는 “모든 유족이 활동가가 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면서도 “ 결국 필요한 것은 유족에게 발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를 선택한 유족의 경험이 침묵 속에 묻히지 않고 정책으로 이어질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