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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는 역부족, 조직화 최우선”… 유족 결집, 제도가 되다 [탐사기획-자살예방법, 살아남은 사람들]

<4회> 영국, 정책을 만드는 유족 <끝>

유족 추모 모임, 자살예방단체로… 의원·의회 찾아 입법 목소리
딸 잃은 세 아버지는 정부에 편지… 학교 정신건강교육 진행시켜
“아픔 경험 단순 사연으로 소비하지 않아… 정책 결정권자에 영향”
영국 자살예방단체 ‘올리스 퓨처’ 설립자 앤 펠로이가 9월11일(현지시간) 영국 워딩의 자택에서 둘째 아들 올리버의 사진 곁에 앉아 있다. 펠로이는 아들을 자살로 잃은 뒤 청년 자살예방 교육과 인식 개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런던=정세진 기자
영국 자살예방단체 ‘올리스 퓨처’ 설립자 앤 펠로이가 9월11일(현지시간) 영국 워딩의 자택에서 둘째 아들 올리버의 사진 곁에 앉아 있다. 펠로이는 아들을 자살로 잃은 뒤 청년 자살예방 교육과 인식 개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런던=정세진 기자

9월11일(현지시간) 영국 남부 해안 도시 워딩의 한 가정집. 청록색 벽 아래 놓인 짙은 갈색 가죽 소파에 앤 펠로이가 앉았다. 머리 위에는 펠로이의 아들 올리버 헤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펠로이는 손바닥으로 소파를 짚으며 “이 소파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앉아 서로 껴안곤 했다”고 말했다.

 

스물두 살에 자살로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 올리버가 자신의 방에서 숨진 뒤 펠로이 부부는 한때 이사를 고민했다. 하지만 떠나지 않았다. 펠로이는 “우리가 도망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가자 검은색 아일랜드 식탁 위에도 올리버가 있었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웃는 사진 앞에 촛불이 켜져 있었고, 옆에는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올리버가 세계를 여행하며 남긴 일기를 엮은 책이 놓여 있었다. 펠로이는 올리버를 기억하며 촛불을 24시간 내내 켜놓는다며 “계속 새것으로 갈아줘야 한다”고 했다.

 

올리버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17년 2월14일이었다. 역사학을 전공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지 6개월 만이었다. 그가 떠난 뒤 집으로 몰려온 것은 스물두 살 안팎의 친구들이었다. 가족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기, 친구들은 모금을 하고 추모행사를 열었다. 런던 버몬지에 모인 이들은 올리버의 애칭인 ‘올리’를 기리고 다른 청년들에게는 그가 잃어버린 미래를 지켜주겠다는 뜻을 담아 단체 이름을 ‘올리스 퓨처(Olly’s Future)’라고 지었다. 2020년에는 정식 자살예방 자선단체가 됐다.

◆숨기던 애도를 런던 한가운데로

 

올리스 퓨처 창립자 펠로이가 세계일보를 만난세계자살예방의 날(9월10일 ) 주간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90분짜리 자살예방교육을 진행했다. 이튿날에는 런던의 중심 트래펄가 광장의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에서 올리스 퓨처가 주관하는 자살 사별자 등을 위한 연례행사 ‘타임 투게더(Time Together)’를 준비했다.

 

2015년 시작된 타임 투게더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한 2020년을 제외하고 매년 열렸다. 자살로 가족을 잃었거나 자신이 자살 생각을 경험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앉아 고인과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자리다.

 

9월12일 행사에서 단상에 오른 한 여성은 18년 전 떠난 언니 린지에 대해 2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시작부터 “오늘은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언니를 직접 만난 적 없는 조카들에게도 지금까지 ‘린지 이모’ 이야기를 들려준다며 “누군가가 더는 물리적으로 우리 곁에 없다고 해서 가족의 일부이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펠로이는 이런 자리를 만드는 이유를 “보이게 만들지 않으면 절대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게 애도는 공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교사 출신인 펠로이는 기업·병원·학교 등이 구성원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이틀짜리 자살예방교육(ASIST)의 강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곧 자살예방교육의 문턱을 체감했다. 직장인이 주중 이틀을 온전히 비우기 어려운 데다 기업이나 병원도 직원들이 교육을 받는 동안 생기는 업무 공백과 대체인력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2018년 정신건강상담사 로즈와 만나 “사람들이 시간을 낼 수 있는 90분짜리 교육을 만들자”고 펠로이가 제안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기: 10가지 방법’이다. 이 교육은 지금까지 1만명 이상이 수료했다고 올리스 퓨처는 밝혔다. 영국 생추어리 주택협회에서는 펠로이와 로즈가 교육한 직원들이 1만1000명의 동료를 상대로 프로그램을 교육하고 있다.

 

교육에서 끝나지 않았다. 펠로이는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의회 초당파 모임에 참여해 의료·교육 정책에도 목소리를 냈다. 그가 한국의 유족에게 가장 먼저 건넨 조언은 “조직화하라”는 것이었다. 펠로이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뒤에 있어야 한다. ‘상황이 나쁘니 뭔가 해달라’고 해서는 안 되고 무엇을 바꿀지 명확하게 요구하고, 연구와 근거를 갖춘 뒤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 딸 잃은 아버지들, 교실을 바꿨다

 

영국에서 유족의 경험이 정책으로 이어진 사례는 올리스 퓨처뿐이 아니다. 2021년, 딸을 자살로 잃은 세 아버지가 서로의 집을 잇는 약 482㎞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컴브리아주 몰런드의 앤디 에어리, 그레이터맨체스터 지역 세일의 마이크 파머, 노퍽주 숄덤의 팀 오언이다. 각각 소피, 베스, 에밀리를 잃은 세 사람은 그전까지 서로 몰랐다.

 

세 사람을 연결한 것은 청년 자살예방단체 파피루스(PAPYRUS)였다. 이들은 자살은 어느 지역, 어느 가정에나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파피루스를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서로의 집을 잇는 여정에서 만난 또 다른 유족 부모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말을 했다. “자살이 우리 아이에게 닥칠 위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녀를 잃은 뒤에야 청년층 자살의 심각성이나 자살예방단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부모도 많았다.

 

세 아버지는 그 질문을 정부로 가져갔다. 흉기 범죄, 마약, 도로 안전, 극단주의까지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왜 자살예방은 직접 다루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첫 걷기를 마친 뒤 정부에 편지를 보냈고, 2022년 초 웨스트민스터(국회)에서 보건부 장관을 만났다.자살예방단체와 학계 연구자들도 회의장에 함께 데려갔다. 앤디는 2024년 열린 한 회의를 전환점으로 기억했다. 회의가 시작될 때 질문은 “학교에서 자살예방을 가르쳐야 하는가”였다. 회의 중반에는 “그렇다면 어떻게 안전하게 가르칠 것인가”로 바뀌었다. 앤디는 “그 순간 완전히 다른 단계로 넘어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영국 교육부가 개정한 관계·성·건강교육(RSHE) 법정 지침은 올해 9월1일부터 잉글랜드에서 시행됐다. 새 지침은 중등학교가 자살예방을 안전하게 다룰 방안을 검토하도록 하고, 자살을 직접 다루기 전 정신건강 전문가와 협의하고 교직원에게 근거 기반 교육을 하도록 했다. 고립과 외로움, 괴롭힘을 이야기하고 자신이나 친구가 위기에 놓였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성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가르치도록 한다. 다만 연간 몇 차례 별도 수업을 해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영국 정부가 지침을 개정하는 과정에는 교사와 전문가뿐 아니라 자살 유족 가족들과의 별도 간담회도 포함됐다. 정부가 실시한 의견수렴에서는 자살예방 교육안에 응답자의 69%가 동의했다. 한국은 자살예방법 시행령에 따라 학교 등에서 연 1회 이상 자살예방교육을 하도록 하고 있다. 교육은 집합교육뿐 아니라 시청각·인터넷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

 

다만 세 아버지도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을 연결하고 교육·모금 활동을 받쳐온 파피루스, 연구자, 국회의원과 자선단체들이 있었다. 세 아버지를 인터뷰한 바로 다음 날인 9월8일, 파피루스는 재정난 끝에 돌연 운영 종료를 발표했다. 30년간 청년 위기상담 등을 해온 대표 자선단체의 폐쇄에 자살예방단체 사마리탄즈는 “자살예방 분야 전체에 중대한 손실”이라며 다른 단체에 수요가 몰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식을 들은 펠로이가 강조한 것도 조직의 힘이었다. 펠로이는 “한 사람이 큰 목소리를 낼 수는 있다. 저도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저 역시 팀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변화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14세 딸의 죽음, 플랫폼 규제의 근거가 되다

 

14세 딸 몰리 러셀을 잃은 이언 러셀이 정부와 소셜미디어 기업의 책임을 묻게 된 계기는 딸의 휴대전화에 남은 기록이었다. 몰리는 2017년 세상을 떠나기 전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 등에서 자해·자살·우울 관련 콘텐츠를 반복해서 봤다. 2022년 영국 검시관은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몰리가 요청하지 않은 자해·자살 관련 콘텐츠까지 반복적으로 제공했고, 이런 온라인 콘텐츠의 부정적 영향이 그의 죽음에 ‘최소한을 넘는 정도로’ 기여했다고 판단했다.

 

가족에게는 판정까지도 싸움이었다. 몰리 로즈 재단 정책 담당자 케이티는 세계일보와 만나 검시 절차가 3년 넘게 이어지는 동안 가족들이 플랫폼 기업을 상대로 자료 공개를 지속해서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검시 결과가 나온 뒤 논의는 “한 아이에게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에서 “플랫폼 기업이 통제할 수 있었던 영역에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언과 가족·친구들이 시작한 캠페인은 이후 온라인 안전 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몰리 로즈 재단’으로 발전했다. 지인을 하나씩 연결하던 가족 캠페인은 상·하원 의원을 만나고 정부에 정책안을 제안하는 조직으로 변했다. 재단은 자신들의 지속적인 캠페인이 2023년 온라인안전법(Online Safety Act) 통과를 촉진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한다.

 

온라인안전법은 자살이나 자해를 조장·홍보하거나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콘텐츠를 아동에게 먼저 차단해야 할 유해 콘텐츠로 규정했다. 2025년 7월부터 플랫폼의 아동보호 의무도 본격 시행됐다.

몰리 로즈 재단에는 유족과 당사자의 참여만을 담당하는 직원도 있다. 정책 회의나 언론 활동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는지, 참여가 오히려 유족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지를 먼저 살핀다. 공개 활동을 하기로 했더라도 모든 사생활을 공개할 의무는 없고 언제든 한발 물러날 수 있다는 원칙도 둔다. “가족의 경험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제 일은 그들을 그 자리에 연결하고 지지하는 것”이라고 케이티는 말했다.

 

영국에서 만난 세 가족의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한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들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세 아버지는 배낭을 메고 길 위에 나섰으며, 한 아버지는 딸의 휴대전화 기록을 들고 플랫폼 기업과 맞섰다. 방식은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자신이 겪은 슬픔이 다른 가족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족의 경험은 단순한 사연으로만 소비되지 않았다. 유족은 조직을 만들거나 기존 단체와 연결했고, 결정권자를 찾아갔다. 마이크는 세 아버지가 특별한 전문가가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그는 “우리는 슈퍼맨 세 명이 아니다. 그냥 나이 든 아빠 세 명이고, 딸을 사랑했던 세 명의 아빠일 뿐”이라고 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109) 또는 자살예방 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 기사는 자살예방 보도준칙 4.0을 준수하였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