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미니멀”이라고 외치는 듯 온통 백색으로 비워진 무대에 오이디푸스가 반나체로 등장한다. 야구공만 한 혹이 달린 것처럼 부풀어 오른 발등을 끌며 걷는 걸음과 불편한 몸짓은 그 자체로 메시지이자 연기다. ‘부은 발’이라는 이름의 뜻을 배우의 몸에 그대로 새겼다.
국립극단이 2025년부터 2년에 걸쳐 선보이는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안트로폴리스’ 5부작 가운데 세 번째 무대다. 워낙 익숙한 서사인 데다 지난여름 국민배우 최수종이 오이디푸스로 무대에 섰고 11월 말에는 국립창극단의 창극 ‘오이디푸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어떤 오이디푸스를 보여줄지가 관건이었다.
구원을 청하는 노인에게 왜 자신이 구해야 하느냐고 되묻는 첫 장면부터 무대는 익숙한 서사를 비켜 간다. 강량원 연출은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수치와 상처로 가득 찬 사람의 몸을 무대에 세웠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웅의 몸 대신 취약한 몸을 전면에 세웠다는 얘기다.
문제는 낯섦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졌느냐다. 배우들은 일상적인 말의 리듬을 끊어내고 문장을 분절해 또박또박 발화한다. 초등학생이 교과서를 낭독하는 듯한 인상마저 든다. 강 연출은 “목소리의 발화도 몸의 영역에 속한다”며 말을 의미뿐 아니라 상태와 심리, 이념까지 실어 나르는 표현의 도구로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전 인터뷰에서도 말과 행동을 일부러 어긋나게 하고 배우마다 다른 리듬과 템포로 말하게 하면 해석이 최대한 늦춰진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 그 지연은 인물 사이의 감정과 관계를 드러내기보다 극 전체의 리듬을 평평하게 누르는 쪽으로 작용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지만 극 전체가 0.75배속으로 재생되는 영화를 보는 듯했다.
본래 ‘오이디푸스’는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속도가 붙는 작품이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과 이오카스테의 기억, 사신과 목동의 증언이 차례로 맞물리며 재난의 원흉을 쫓던 의심이 끝내 오이디푸스 자신을 향해 좁혀 드는 것이 이 비극의 동력이다. 그런데 이번 무대에서는 비슷한 발화와 속도가 반복되면서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높아져야 할 긴장이 좀처럼 솟지 않는다. 갑갑함은 오이디푸스의 출생 비밀이 온전히 드러나는 목동 장면에서 더 커진다. 원작에서 목동은 끔찍한 말을 해야 하는 문턱에서 버티고 오이디푸스는 그래도 들어야 한다며 몰아붙인다. 말하지 않으려는 자와 들어야만 하는 자가 부딪치는 짧은 문답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번 무대에서는 말을 잃은 목동의 수어를 어린이가 대신 목소리로 옮긴다. 취약한 몸과 돌봄이라는 작품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설정이다. 하지만 하필 가장 참혹한 진실이 객석을 향해 폭발해야 할 순간에 말이 수어와 통역을 거쳐 느릿하게 도착하면서 극적 긴장까지 함께 풀려버린다.
강량원 작품의 특징인 낯선 신체 움직임도 관객이 받아들이려면 넘어야 할 문턱이 높다. 강 연출은 신체 행동을 상대의 몸과 관계하며 함께 사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미디어화된 사회일수록 관객이 인간의 몸을 직접 경험하는 연극 무대가 귀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객석에서 적지 않은 몸짓은 관계를 드러내는 행위보다 의미를 해독해야 할 기호처럼 다가왔다. ‘왜 저렇게 말하고 움직이는가’라는 물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강 연출은 카타르시스 대신 관객이 끊임없이 질문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객석에 남은 것은 재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성찰이 아니라 저 몸짓이 무슨 뜻이냐는 의문이었다.
“나는 시간 속에 묻혀 있었다. 인간들은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은 기억한다. … 구하려면 외면해야 한다. 알려면 포기해야 한다.” (금강석)
말·개·염소·독수리·금강석 같은 비인간 존재를 목격자이자 코러스로 끌어들인 장면은 이번 무대만의 시선이 분명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강 연출은 인간 밖으로 밀려난 비인간의 관점과 몸으로 지금의 인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붉은 조명 아래 비인간들이 눈먼 오이디푸스를 겹겹이 에워싸는 장면은 한 폭의 군상화처럼 강렬하다.
무대도 철저히 비웠다. 거대한 장벽이 무대 대부분을 가로막아 앞쪽 4분의 1 남짓만 쓴다. 흰 벽이 붉은 벽으로 바뀌거나 벽 아래가 들려 검은 틈이 드러나는 정도의 변화를 거쳐 마지막에야 벽을 걷어내고 대형 화면으로 오이디푸스가 떠날 황야를 보여준다. 몸을 잘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인간 중심 세계 바깥을 상상하게 하려는 구상은 분명했다. 그러나 긴 시간 억눌러둔 공간이 마지막 개방에서 충분한 정서적 보상으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이번 공연은 익숙한 ‘오이디푸스’를 낯설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부은 발과 취약한 몸, 분절된 발화와 신체 움직임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비극적 인간을 넘어 새로운 오이디푸스를 얼마나 선명하게 빚어냈는지는 의문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충실했다. 말도 몸도 무대도 익숙한 ‘오이디푸스’와 거리를 뒀지만 그 거리는 새로운 감상을 열어주기보다 작품에 다가가는 길까지 멀게 만든 쪽에 가까웠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0월 18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