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체조 국가대표 시절엔 감기약 하나를 먹는 것도 두려웠다. 그에게 도핑방지 규정은 ‘나를 지키는 장치’보다 ‘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규정’이었다. 혹시라도 금지약물을 잘못 복용하면 선수 생활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이 앞섰다.
이제는 선수들에게 도핑방지 규정을 설명하고 있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클린스포츠 앰배서더로 활동한 김나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선수위원장의 이야기다.
선수 시절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도핑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김 위원장은 4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선수 시절에는 그저 복용하면 안 되는 약물에 집중하며 부담을 느꼈다”면서 “하지만 지금 선수들 앞에 서 보니 도핑방지의 진짜 본질은 제재가 아니라 나 자신과 내가 흘린 땀의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아시안게임 현장에서 김 위원장이 만난 선수들의 환경은 제각각이었다. 한·중·일처럼 도핑방지 체계가 비교적 갖춰진 국가에서는 대회 전 검사와 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지만, 일부 국가 선수 중에는 도핑검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영양제를 복용하면서도 금지약물 포함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을 몰라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 위원장은 “단순히 규정을 알려주는 교육을 넘어 어떤 환경의 선수든 쉽고 공평하게 올바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현장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고 전했다.
선수들이 실제로 맞닥뜨리는 위험은 병원 처방약과 영양제·보충제에서도 발생한다. 김 위원장은 특히 의료진의 처방을 무조건 안전하다고 여기는 인식을 경계했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운동선수라고 밝힌다고 해서 의사가 도핑 금지약물 성분까지 완벽하게 구분해 처방하기는 어렵습니다.”
감기약에 흔히 쓰이는 에페드린 성분을 비롯해 일부 한약재와 피부과·비뇨기과 처방약 등은 경기 기간 금지물질에 해당할 수 있다. 보충제 역시 제조 과정에서 금지물질이 섞이는 ‘교차 오염’ 가능성이 있기에 김 위원장은 “100% 안전한 보충제는 없다”고 강조했다. 몸이 아프거나 보충제를 섭취해야 할 때는 KADA의 금지약물 검색 시스템이나 글로벌 DRO(약물검색서비스)를 활용해 성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도핑방지 규정에서는 선수가 자신이 섭취하거나 복용한 물질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 김 위원장도 선수 시절에는 이 원칙을 두렵고 억울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공정한 경쟁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원칙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몰랐다’거나 ‘남이 줘서 먹었다’는 핑계가 통용된다면 의도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거짓말하는 선수를 막을 방법이 사라진다”며 “결국 정직하게 피땀 흘려 노력한 선수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선수 개인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는 데도 한계가 있다. 특히 유소년 선수는 선수 지원 요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의료 현장에서 금지약물 정보가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 문제와 치료목적사용승인(TUE) 절차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도 과제로 꼽았다. 김 위원장은 “보충제 역시 국가나 공인기관 차원에서 선수용 제품을 인증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 돌아본 운동 인생에서 김 위원장이 중요하게 여긴 것도 메달의 색깔만은 아니었다. 그는 “도핑이나 편법으로 얻은 결과는 순간의 영광을 줄 수 있지만 평생 ‘진짜 내 실력이 아니었다’는 불안감과 죄책감을 남길 수 있다. 반대로 정직한 기록은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운동 인생 전체를 받쳐주는 자부심이 된다”고 밝혔다.
그래서 지금의 김 위원장은 규정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수 시절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을 알기에 후배들에게도 다른 방식의 교육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과거의 저라면 도핑방지 규정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아니라 선수들의 불안을 지워주는 따뜻한 선배가 되어 달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김 위원장은 후배들을 향해 “순간의 유혹 때문에 본인들이 흘렸던 땀과 노력이 흐려지지 않도록 끝까지 원칙을 지키며 도전했으면 한다”며 “정직한 노력이 만드는 정당한 승리의 기쁨을 꼭 만끽하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