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지도자는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할까. 솔선수범하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남을 헤아리며, 신앙을 사회와 나라에 대한 기여로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통일교회 초창기 신앙인 황환채의 증언집에는 가난 속에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를 앞세운 삶이 담겨 있다. 그의 발자취는 종교지도자의 덕목을 되돌아보게 한다.
193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 6사단에서 종군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참화를 겪은 청년은 1952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다.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하던 고학생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4년 10월, 친구의 안내로 찾아간 서울 북학동의 작은 교회에서 그의 생애는 새로운 방향으로 향했다.
통일교회가 창립된 그 집은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대문이 낮았다. 유효원 초대 협회장은 불편한 몸으로 갱지에 연필을 눌러 쓰며 교리를 강의했다. 출발은 그렇게 소박했다.
그 무렵 문선명 총재가 고학하는 형편을 헤아려 고학생에게는 큰 돈인 100만 환을 건넨 일이 있었다. 그는 감사히 받은 뒤 “이제 이것은 제가 드리는 것이오니 받아주십시오”라며 돌려드렸다. 자신에게도 요긴한 돈이었지만 공동체에 보태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문 총재에게 양복 한 벌을 받았을 때도 더 어려운 한의과 대학생에게 주었다.
궂은일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충동교회에서 그가 줄곧 화장실 청소를 하자 김영운 전 이화여대 교수가 이제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청했다. 그는 괜찮다며 계속하겠다고 했다. 서로 낮은 일을 맡겠다고 나선 이 장면에는 초창기 신자들이 공동체를 일군 방식이 담겨 있다. 솔선수범은 남에게 짐을 넘기지 않고 궂은일을 먼저 맡는 데서 시작됐다.
신앙의 선택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55년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통일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길을 이어갔다. 그해 문 총재가 수감돼 있던 시기에 쓴 노랫말 ‘내 가오리다’는 성가가 됐다. 누가 가느냐고 묻기 전에 자신이 가겠다는 다짐은 이후의 삶에도 이어졌다.
전쟁 뒤 보릿고개가 이어지던 시절, 헌신의 현장은 늘 고난과 맞닿아 있었다. 1957년 전주로 첫 목회를 가서도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고물을 모아 팔아가며 자기 손으로 공동체를 꾸렸다. 교회의 발전과 신자들의 신앙을 위해 21일 금식기도도 했다. 경남지구장으로 부임해서는 공장 식당에서 일하던 신자가 모아온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지역장 생일에도 상에 오른 것은 옥수수죽이었다. 기차표 값이 없어 서울 회의에 가려고 밤 완행열차를 타고 11시간을 달리기도 했다.
농촌 개척지를 돌 때는 자전거 뒤에 미숫가루 봉투를 실었다. 하루 300리 길을 달리기도 했고, 몸에 상처가 나 피가 배어도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아갔다. 삼복더위에 땀으로 흠뻑 젖어 도착하면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던 이들과 말없이 울었다. 가난한 공동체를 지탱한 것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한 사람의 정성이었다.
그 헌신은 교육과 조직의 기반으로 쌓였다. 학생부장과 대학원리연구회 지도자로 청년들을 이끌며 농촌계몽과 남북통일, 세계평화 활동을 펼쳤다. 1977년 제3대 협회장이 된 뒤에는 연령별 교육교재와 전도용 소책자를 마련하고, 통일신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며, 새 본부교회도 세웠다. 통일신학교는 이후 성화신학교와 합병해 선문대학교로 발전했다.
애국심도 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일로 나타났다. 학도병으로 나라의 위기를 겪었던 그는 훗날 수산업 경영을 맡아 경제에 기여했다. 증언집에 따르면 흥영수산 등의 일을 맡은 뒤 새우잡이 사업으로 3년 만에 투자자본을 회수했다. 중남미의 어업기지와 해외 수산 현장을 오가며 새우와 참치를 일본에 수출했고, 그 성과로 1983년 500만 불 수출탑을 받았다. 가난한 교회의 살림을 돕던 손이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현장까지 뻗어간 것이다.
1995년에는 세계일보 사장으로 새로운 책임을 맡았다. 신문협회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언론계와 정부 인사들을 만났다. 통일교회의 활동과 통일운동을 설명하며 오해를 풀고자 했다. 신문사가 사회와 접촉하는 폭을 넓히고, 종교공동체와 사회 사이에 대화의 길을 내는 일이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농어촌 살리기’ 캠페인이다. 그는 농어촌의 성공사례를 발굴해 지면에 소개하고 농어민 기술상 제도를 마련했으며 우수 수상자의 해외연수를 지원했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고생하는 농어민에게 신문이 관심과 기회를 건넨 것이다. 신문의 위상은 이처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통해 높아진다. 이후 카자흐스탄에서도 정부 고위층을 만나 한국과의 문화교류, 고려인의 지위와 인권을 논의했다. 신앙이 삶을 움직였고, 그 삶이 사회와 만났다.
황환채의 삶은 한 종교의 역사와 함께 한국 현대사의 고난을 견딘 한 사람의 기록이다. 청렴함과 솔선수범이 공동체를 살리고, 그 헌신이 사회와 나라에 대한 기여로 이어졌다. 그가 첫 목회를 떠나며 품었던 “명령하지 않으리라. 나를 보고 따라오게 하리라”는 다짐은 오늘의 정치인과 기업인, 종교지도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