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기고] 알기 쉬운 법령이 국민의 권익을 지켜 준다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올해로써 한글날을 제정한 지 100돌을 맞이한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지금의 한글학회)는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가갸날’로 정하여 기념하였다. 우리말 음절을 익힐 때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라고 하는 데에서 ‘가갸’를 따왔다. 이태 후에 이름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우리는 한글날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높은 뜻을 기리며, 일상생활에서 우리글과 우리말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글쓴이는 오늘 법령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나라의 법령은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주어진 의무를 소홀하지 않도록 하는 규범이다. 그래서 법령의 단어와 문장은 알기 쉽고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도 법령에는 어렵거나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지 않는 단어가 많았다. 주로 일본어에 뿌리를 둔 용어를 그대로 가져왔었다.

권재일 한글학회재단 이사장
권재일 한글학회재단 이사장

예를 들어, 과거 정부기업예산법에 쓰인 ‘양곡의 매입자금과 양곡관리를 위한 조작비를… 대행기관에 전도할 수 있다’에서 ‘조작비’나 ‘전도’는 전문가가 아니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익숙한 우리말로 조작비는 ‘관리비’, 전도는 ‘선지급’으로 다듬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법을 고쳤다. 또 과거 수표법 제16조에 ‘배서는 수표 또는 이에 결합한 보전에 기재하고’에서 ‘보전’은 전문가가 아니면 뜻을 알 수 없다. 보전의 사전 뜻풀이는 ‘증권이나 증서에 배서와 보증이 많아 여백이 없는 경우에 덧붙이는 종이’이다. 지금은 ‘보충지’로 다듬었다.

법령의 단어와 문장은 알기 쉽고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해 온 일이지만, 알기 쉽다는 기준에 대한 법률가와 일반 국민 사이에 인식 차이가 컸기 때문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20년 전, 2006년에 법제처가 발 벗고 나섰다. 바로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이다. “쉬운 법령, 뚜렷한 법령, 반듯한 법령, 자연스러운 법령”을 지향하면서, 알기 쉬운 법령의 정비 기준을 마련하고 법령 하나하나를 개정해 왔다. 지난 20년 동안 무려 1200여건의 법률과 4000여건의 하위법령을 알기 쉽고 명확하게 개정하였다. 국민의 권익을 지키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단어와 문장 표현을 다듬은 예가 많지만, 한 예만 더 살펴보겠다. 법령에서 잘못 써 온 대표적인 단어가 ‘자문하다’이다. ‘자문하다’는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다’라는 뜻이다. 즉, 전문가에게 자문하고, 전문가는 그 자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았다’와 같이 단어의 뜻을 거꾸로 쓰는 경우가 자주 쓰였다.

건축법 제2조에 나오는 ‘설계자라 함은… 지도·자문하는 자를 말한다’에서 ‘자문하는’은 말이 안 된다. ‘묻는’이 아닌 ‘묻는 내용에 대해 대답하는’이란 뜻이어야 한다. 지금은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으로 ‘지도하고 자문에 응하는’으로 바르게 다듬었다.

말이 의사소통의 구실을 제대로 하자면 쉽고 정확해야 한다. 행정기관에서 쓰는 공공언어는 더욱 그러하다. 대표적인 공공언어인 법령이야말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와 직접 관련되어 있어 다른 어떤 공공언어보다 더 쉽고 정확해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지난 20년 동안 법제처에서 법령을 알기 쉽게 다듬어 온 사업은 국민이 국가와 올바르게 소통하도록 해 준 매우 값진 일이었다. 앞으로도 쉼 없이 이 사업이 추진되어 국민의 권익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기를 소망한다.

 

권재일 한글학회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