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유무역 질서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 심장부인 상소 기구는 미국의 위원 재임명 거부로 2019년 12월 정족수를 잃은 뒤 6년 넘게 정지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4월 ‘해방의 날’을 선포하며 WTO 절차를 건너뛴 채 국가별 상호관세를 일방 부과했고, 한국은 10월 3500억달러 투자로 겨우 15%로 관세를 낮췄다. 다자 규범이 아닌 협상력이 통상을 좌우하는 시대다.
한국은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무역의존도는 2022년 94.8%(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은 2024년 36.6%로 주요 20개국(G20) 중 3위다. 아이디어와 특허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사업할 수 있던 시기에 전 세계 특허출원은 1995년 100만건에서 2024년 370만건으로 급증했고 한국 특허청도 세계 4위가 되었다.
하지만 균열이 뚜렷하다. 미국인의 중국 내 특허출원은 2022년 4만3100건으로 정점을 찍은 후 2024년 3만9600건으로 줄었다. 러시아 침공 이후 2023년 외국인 특허출원은 전년 대비 23.7% 급감했는데, 미국 -25%, 독일 -41%, 프랑스 -39%로 서방의 낙폭이 특히 컸다. 러시아가 ‘비우호국’ 특허권자의 보상청구권을 제한하면서 특허 제도 자체가 작동을 멈춘 시장이 생겨난 것이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게 영업비밀이다. 미국 연방영업비밀보호법(DTSA), 유럽연합(EU) 영업비밀보호지침 제정에 이어 한국도 2024년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으로 영업비밀 해외유출 형량을 징역 15년·벌금 15억원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5배로 상향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기술이 산업을 넘어 안보 그 자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대만은 TSMC가 세계 첨단반도체의 90% 이상을 생산한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무력 병합을 억제하는 ‘실리콘 방패’를 갖췄다. 한국도 반도체·배터리·조선·원자력·방산이 국제 위상의 핵심 지렛대다. 지난해 10월 한·미 관세협상에서 조선·반도체·배터리 역량이 3500억달러 대미투자 타결을 이끌었고, 아랍에미리트(UAE)에 실전 배치된 ‘천궁-Ⅱ’가 90%대 요격률을 기록하며 원유 최우선 공급 약속까지 끌어냈다. 팔란티어의 인공지능(AI) 플랫폼과 드론은 우크라이나전에서 전쟁의 게임체인저가 되고 있다.
이처럼 안보와 직결된 기술이기에 바세나르 체제, 원자력공급국그룹(NSG),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미국의 수출관리규정(EAR) 등 분야별 통제 규범이 촘촘해지고 있다.
특허만 받으면 세계를 상대로 자유롭게 무역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술이 국가안보를 좌우하는 핵심자산이 될수록 기업과 국가는 그 공개를 꺼리고 통제를 강화한다. 따라서 우리 기업도 공개를 전제로 하는 특허보다 영업비밀에 의한 보호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동안 특허 전문가들은 공개하지 않고 따라서 기술발전에 기여하지 않는 영업비밀 보호에 인색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고의 틀을 버릴 때다. 또한 지식재산권을 넘어 기술분야마다 고유하게 작동하는 기술통제 규범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함께 요구된다. 이제는 내 기술이라고 마음대로 거래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준비한 기업만이 다음 시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박성준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리사·전 특허심판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