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악의 감염병으로 꼽히는 흑사병(페스트)은 쥐와 벼룩이 옮긴다. 몸이 까맣게 된 채 죽어간다고 해서 흑사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1346~1353년 유럽 전역에서 7500만~2억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에 따라 전체 인구의 60%가 사망하기도 했다. 발원지는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았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페스트균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로 퍼졌다는 것이었다.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름반도 카파항을 포위하면서 흑사병이 유럽으로 퍼졌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몽골군이 페스트로 숨진 시신을 성안으로 던졌다는 이야기는 전염병의 역사에서 악명 높은 장면으로 남아 있다.
실체는 최근 유전자 분석을 통해 상당 부분 밝혀졌다. 2022년 6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는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기원이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인근 톈산산맥 계곡이라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연구진은 “14세기 무덤을 통해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유럽을 휩쓴 페스트균이 시작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당시 기상이변 등으로 톈산산맥 계곡의 설치류가 부쩍 늘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페스트균이 1338~1339년 폭발적 변이를 겪고 치명적 전염병이 됐다고 추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현재도 페스트균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지역, 이른바 ‘자연 발생지’가 남아 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역시 그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설치류와 벼룩을 중심으로 페스트균이 생태계 안에서 순환한다. 흑사병은 역사의 유물이다. 그렇다고 감염병의 위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연구소에서 ‘흑사병’의 원인균인 페스트균 유출 의심 사고가 불거지면서 다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여성 연구원 1명이 숨진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황을 “강력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고, 유럽연합(EU)과 WHO도 경위 파악에 나섰다. 현지 매체에서는 유사 감염자로 의심되는 두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14세기 흑사병은 인간의 무지를 공격했다. 21세기에는 인간의 방심과 관리 실패를 노린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그랬다. 인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