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70년간 살던 집에서 쫓겨나며 스페인 전역의 시위를 촉발한 87세 노인이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 주거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양대 노조는 14년 만에 총파업을 결의했다. 시위를 계기로 조기 총선까지 확정되면서, 한 노인의 불행한 죽음이 스페인의 정계 재편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낳게 됐다.
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스페인 마드리드세입자연합은 마리아 델 카르멘 아바스칼이 병원에서 숨졌다고 밝혔다. 연합은 성명을 통해 “그의 죽음은 이 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며 “투기는 생명을 앗아가고 오늘날의 임대 경제는 우리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의 기억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마리카르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 지난달 23일 새 임대업체가 급격히 올린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집에서 강제 퇴거당했다. 경찰이 마리카르멘을 끌어내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스페인 주거난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그는 퇴거당한 뒤 심한 불안과 탈진 증세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마리카르멘을 퇴거시킨 업체는 여론의 압력에 월세를 낮추고 퇴거 조치를 취소하기로 했으나, 그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리카르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의 거점으로 자리 잡은 수도 마드리드 시내의 푸에르타델솔 광장에서는 큰 탄식이 터져 나왔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시민들은 광장에 제단을 만들고 촛불을 켜며 추모 행사를 열었다. 수백명의 시위대는 ‘이것은 죽음이 아닌 살인’, ‘투쟁은 계속될 것’ 등의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광장에서 약 500m 떨어진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했다. 시위에 참가한 한 시민은 통신에 “이번 사건은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이라며 “스페인 주택 위기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양대 노조인 노동자총연맹(UGT)과 노동자위원회(CCOO)는 주택 문제에 항의하며 다음달 11일부터 2주간 전국 총파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양대 노조가 동시에 총파업에 나서는 것은 14년 만이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엑스(X)에 마리카르멘과 유족들에 애도를 표하며 “오늘 이 슬픔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는 모든 분들께도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제1야당 인민당의 알베르토 누녜스 페이호 대표는 “죽음 앞에서 중요한 것은 존중뿐”이라며 마리카르멘의 죽음을 정치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시위는 산체스 총리의 운명에도 변곡점으로 작용하게 됐다. 시위가 격화됨에 따라 이달 초 여당 사회노동당 연립정부는 이달 초 임대차 계약 자동 갱신과 취약계층 퇴거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대책을 추진했으나 야권 반발로 부결됐다. 우파 성향 야권은 정부의 주택시장 개입이 임대주택 감소와 가격 상승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산체스 총리는 개혁 동력을 마련하겠다며 다음달 29일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고 발표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의회에서 영향력을 잃고 있는 산체스 총리가 시위를 계기로 다시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는 ‘도박수’를 띄웠다는 시각이 제기된다. 중도좌파 성향 사회노동당 연립정부는 그간 협조해 온 분리주의 정당 ‘카탈루냐와 함께’가 지난해 지지를 철회하면서 의회 과반을 상실하며 힘을 잃은 상황이다. 여론조사 지지율상으로도 여당의 패배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주거난 시위가 유리한 의제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산체스 총리가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여당의 주택난 대책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전국에서 시위가 격화하는 등, 여론도 호의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산체스 총리가 권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일부 마리카르멘 덕분이기도 하다”며 “그는 유럽의 주류에 반하는 좌파 정책을 펼치며 정치적 생존력을 보여줘 왔다”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