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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사라져도 신뢰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화폐 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화폐 이야기/성창훈·우진구/매일경제/2만3500원

 

지폐가 사라지는 시대, 돈을 만드는 기관은 무엇으로 살아남을까. 지갑에서 현금이 빠져나가고 결제가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조폐공사도 존립의 기로에 섰다. 화폐 사용량이 줄면서 전통적인 조폐사업만으로는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세상을 바꾸는 화폐 이야기’의 대표 저자 조폐공사 성창훈 사장(왼쪽)과 우진구 홍보실장.
‘세상을 바꾸는 화폐 이야기’의 대표 저자 조폐공사 성창훈 사장(왼쪽)과 우진구 홍보실장.  

‘세상을 바꾸는 화폐 이야기’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꾼 한국조폐공사의 변화와 혁신을 담은 기록이다. 책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한 사업 전환이 아니다. 변화의 출발점은 기술이나 돈보다 ‘사람’이었다. ‘조폐가 산업이다’라는 새로운 관점 아래 조직문화를 바꾸고 디지털과 문화, 수출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2025년 온누리상품권 통합 시스템 장애다. 론칭 당일 시스템이 다운됐지만, 조직은 책임자를 찾기보다 복구에 집중했다. 최선을 다한 직원들을 믿었고, 실패한 직원에게는 오히려 “실패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실패를 처벌하면 조직은 도전을 멈추지만, 실패를 학습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변화는 사업의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지역 화폐와 모바일 상품권, 블록체인 기반 모바일 신분증 등 디지털 사업에 뛰어들었고, 반세기 넘게 축적한 위·변조 방지 기술을 여권과 미술품 인증 분야로 확장했다. 특히 AI 기반 디지털 워터마크는 작품 이미지에 창작자 정보와 인증 데이터를 보이지 않게 새겨 진품 여부를 확인하도록 한다. 지폐의 진위를 가리던 기술이 미술시장의 신뢰를 지키는 기술로 바뀐 셈이다.

 

화폐를 문화콘텐츠로 바라본 발상도 눈길을 끈다. BTS 데뷔 10주년과 손흥민의 골든부츠 수상을 기념한 메달은 조폐 기술과 K컬처의 만남이다. 화폐 부산물로 볼펜과 기념상품을 만들고,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이중섭의 ‘황소’를 요판화로 되살리는 시도에서는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성창훈·우진구/매일경제/2만3500원
성창훈·우진구/매일경제/2만3500원

책이 말하는 화폐의 미래는 돈의 미래만이 아니다. 지폐와 동전이라는 형태가 줄어들더라도 지켜야 할 본질은 남는다. 바로 ‘신뢰’다. 위조를 막던 기술은 디지털 신분증의 신뢰를 만들고, 화폐 제조 과정에서 쌓은 기술과 경험은 새로운 산업의 기반이 된다.

 

디지털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도 필름이라는 기존 사업에 머물다 쇠락한 코닥의 역사는 이 책이 던지는 경고이기도 하다. 변화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지만, 변화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한 공기업의 성공담을 넘어 변화의 시대에 조직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묻는다. 돈을 만드는 기관이 결국 찾아낸 것은 돈 너머에 있는 가치,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였다는 게 책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