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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섭의전쟁이야기] 러일 전쟁 이기고도 배상금 못 받은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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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9월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승자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이날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열린 강화 반대 집회는 폭동으로 번져 계엄령까지 내려졌다. 일본 국민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만큼 배상금을 기대했지만, 정작 러시아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왜였을까?

일본의 핵심 전쟁목표는 한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비해 국력이 열세한 일본은 장기전을 벌일 수 없었다. 반대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병력을 계속 증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빨리 이겨야 했고, 러시아는 오래 버티면 됐다.

1905년 도쿄 히비야 폭동을 묘사한 그림엽서(에도도쿄박물관 소장).
1905년 도쿄 히비야 폭동을 묘사한 그림엽서(에도도쿄박물관 소장).

일본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제해권 확보였다. 뤼순의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살아 있는 한 일본군의 상륙과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904년 2월 개전과 동시에 일본 해군은 뤼순함대를 기습하고 봉쇄했지만 제거하지 못했다. 결국 육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요새를 공격했고, 그해 12월 203고지를 점령한 뒤 중포로 항내의 태평양함대를 파괴했다.

태평양함대를 증원하러 떠난 러시아 발틱함대가 7개월 넘게 항해하는 사이 뤼순은 함락되고 태평양함대도 사라졌다. 1905년 5월 대한해협에 도착한 발틱함대의 목표는 블라디보스토크 돌파뿐이었다. 일본 연합함대는 쓰시마에서 이를 사실상 궤멸시켰다.

그러나 쓰시마 해전의 대승도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만주에서는 전략적 교착이 형성됐고 러시아군은 계속 증강됐다. 반면 일본의 재정과 동원 능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일본은 러시아가 거부하는 조건까지 강요할 만큼 이기지는 못했다. 배상금을 받으려면 계속 싸울 수 있어야 했지만, 일본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과 사할린 전체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 한국에 대한 우월권, 뤼순·다롄 조차권, 남만주철도, 남사할린을 얻었다.

일본의 승리는 철저한 준비와 명확한 목표, 러시아의 실패와 혼란, 쓰시마의 대승이 함께 만든 결과였다. 그러나 히비야의 폭동은 일본 국민이 기대한 승리와 실제 승리 사이의 간극을 드러냈다. 일본은 러시아를 꺾었지만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고, 더 싸우면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에 멈췄다. 그럼에도 이후 일본의 기억에는 승리의 한계보다 대국 러시아를 꺾었다는 사실이 더 강하게 남았다. 태평양전쟁이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연장은 아니지만, 일본이 훗날 잊은 것은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멈출 때를 아는 것이 더 어렵다는 1905년의 진짜 교훈이었는지도 모른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