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높은 곳을 바라본다. 더 높은 직함, 더 큰 권한, 더 넓은 영향력을 꿈꾼다. 그래서 이미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스스로 그 자리를 내려놓고 낮은 곳으로 향하는 모습은 낯설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한 ‘특이한’ 의사들이 있다. 명망 있는 의료계 인사이지만, 화려한 이력보다 환자와 주민을 직접 만나는 일을 택했다. 의사의 소명을 묵묵히 이어가는 이들이다.
정기석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지난달 중순부터 서울 용산구보건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정 전 이사장의 이력만 놓고 보면 그의 보건소행은 이례적이다. 차관급인 질병관리본부장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낸 이가 기초자치단체의 지방기술서기관(4급)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국가의 감염병 대응과 국민건강보험을 이끌었던 그가 주민의 건강을 살피는 현장으로 향한 것이다.
“왜 굳이 보건소장을 가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담담했다. “평소 의사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의 높이가 아니라 사명감이라 생각해왔다”고 했다. 아내(박해심 아주대병원 교수)와도 상의했는데 ‘잘한 선택’이라고 응원했다. 그래서 지원서를 냈다고 설명했다.
구청 보건소장은 눈에 띄는 자리가 아니다. 언론의 조명을 받는 일도 많지 않다. 하지만 주민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예방접종을 하고, 만성질환을 관리하고, 감염병에 대응하며, 취약계층의 건강을 살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보건소장을 “국가 의료정책의 숫자 뒤에 가려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마주하는 공중보건 현장의 중요한 책임자”라고 정의한다. 명예나 체면을 앞세웠다면 선뜻 내리기 어려운 길이다. 생각은 할 수 있어도 누구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종철 전 삼성서울병원장의 행보는 극적이다. 그는 국내 의료계를 대표하는 의사이자 병원 경영자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주치의를 맡기도 했다. 대형병원 경영의 정점에서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쌓은 그는 병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2018년, 70세 나이에 경남 창원시 보건소장이 됐다. 고향에서 의사로 봉사하며 사는 것이 그의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였다. 2024년부터는 강남구보건소장으로 옮겨 주민들의 건강을 살피고 있다. 그는 “지역에서 공공의료의 새 모델을 만들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게 마지막 소명”이라고 말한다. “높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과 낮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이 다를 뿐, 결국 의사가 환자를 위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도 했다.
주혜란 박사의 삶도 눈길을 끈다. 1977년 28세에 국내 최초·최연소 여성 보건소장이 된 그는 이후 미국과 국제기구 등에서 활동한 의료·보건 분야의 원로다. 그가 2022년 강원 양구보건소장이 1년여 동안 공석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직접 지원했다. 그렇게 2년간 지역 주민의 건강을 돌봤다. 지금은 인근 영월의 한 요양병원장을 맡아 환자를 돌보고 있다. 주 박사는 “의사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환자 곁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준비 안 된 이가 ‘높은 자리’를 탐하다 논란에 휩싸인 모습을 지켜본 터라 이들의 선택은 더욱 각별해 보인다. 낮은 자리로 내려왔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그들의 삶은 오히려 더 높아 보인다. 의사의 소명은 직함에 있지 않고 환자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황혼의 삶이 아름답다. 힘껏 박수를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