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슈퍼카, 명품. 한국힙합을 떠올리면 재력을 과시하는 ‘플렉스(flex·자랑하다)’가 연상된다. 서로를 깎아내리는 ‘디스(diss·비판하다)’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가 자리 잡은 데는 부와 성공을 내세운 가사와 ‘디스’ 배틀(대결)을 대중에게 선보인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영향도 작지 않다. 하지만 30여년치 한국힙합 가사를 모아 들여다보니 예상과 달랐다. 래퍼들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고, 세상을 비판하고,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12일 세계일보가 1990년 이후 발표된 주요 한국힙합 4008곡의 가사를 분석한 결과, 돈과 명성 등 현재의 성공을 과시하는 플렉스가 담긴 가사의 비중은 5.3%였다. 특정 인물이나 세력을 공격하는 디스의 비중도 6.6%에 불과했다. 반면 연애와 이별 등을 다룬 사랑은 17%로 가장 높았다. 삶과 가치관을 돌아보는 개인적 사유는 9.5%, 사랑을 제외한 불안·우울·고독 등 내면 감정은 7.8%였다. 사회 현실과 음악에 대한 헌신도 각 7.5%로 플렉스보다 비중이 컸다.
힙합의 비트(박자)를 타는 것은 한국 청년의 역사를 운반하는 것이었다. 가사는 래퍼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각 시대 청년들이 무엇을 보고 겪었는지를 담았다. 강일권 대중음악평론가는 한국힙합의 고유한 색을 “한국에 살면서 그 나이에 겪는 경험을 가사에 녹여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평론가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정서를 담은 가사가 당시 팬들의 공감을 얻었다며, 그런 이야기는 다른 나라 힙합에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19년간 영어 가사 2만3461곡을 번역해 온 래퍼 출신 의사 댄스디(본명 권우찬·39)는 힙합의 특징으로 자유로운 표현을 꼽았다. 강북삼성병원 순환기내과 교수인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마저도 표현할 수 있는 게 힙합”이라며, 직접 가사를 쓰고 랩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풀어낸다고 말했다.
현재 활동하는 래퍼들도 가사의 출발점으로 자신의 경험을 삼았다. 래퍼 마이노스(43·최민호)는 “10대, 20대, 30대, 40대의 나를 그때 가사에 담아내야 한다”며 “지금의 내가 생각하고 있거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래퍼 권선홍(32)도 “힙합이라는 음악은 원래 자기 얘기를 하는 장르”라며 “클래식이나 아이돌 음악을 좋아했다면 내 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못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번 분석에서는 한 곡을 하나의 주제로만 분류하지 않았다. 한 노래 안에 돈과 가족, 불안,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함께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사에서 각 주제가 차지하는 의미상의 비중을 나눠 곡별 합계가 100%가 되도록 했다. 기사에 제시한 수치는 해당 기간 곡들의 주제 비중을 평균한 값이다.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로 분류했다. 고난과 무명을 딛고 올라온 이야기는 ‘성장 서사’, 이미 얻은 돈과 명성을 드러내는 내용은 ‘플렉스’다.
시기별로 보면 가사의 관심사가 달라진다. 1990∼1998년에 발표된 181곡에서 사랑이 차지한 비중은 평균 44.6%였다. 랩이 대중가요 안에서 하나의 표현방식으로 널리 쓰이던 시기의 특징이다.
언더그라운드(방송·대형 기획사 밖에서 활동하는 음악 영역) 힙합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90년대 말에는 장르와 사회를 향한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1999∼2005년에 발표된 1005곡에서 사회 현실은 10.4%, 음악에 대한 헌신은 8.7%, 크루 자긍심은 4.3%였다. 세 주제의 합은 23.4%다.
외환위기 직후 청년들이 마주했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15~29세 청년 실업률은 1997년 5.7%에서 1998년 12.2%로 치솟았고 1999년에도 두 자릿수(10.9%)를 유지했다. 이 시기 가사에서는 개인의 부와 성공보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장르에 관한 이야기가 더 큰 몫을 차지했다. 사회 현실에 대한 비중은 1999년 15.8%, 2000년 15%였다. 음악에 대한 헌신은 2001년 13%까지 높아졌다. 힙합을 향한 애정, 자신들이 만드는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가사에 담겼다.
201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커졌다. 성장 서사와 플렉스를 합친 비중은 2006∼2011년 평균 6.6%에서 2012∼2016년 16.7%로 뛰었고, 2017∼2020년에는 20.7%까지 높아졌다. 반면 사회 현실 비중은 1999∼2005년 10.4%에서 2017∼2020년 5.5%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특히 돈과 명성을 직접 드러내는 플렉스가 빠르게 늘었다. 1999∼2005년 평균 1.3%였던 플렉스 비중은 2017년 11.1%, 2018년 13%, 2019년 13.4%, 2020년 14.0%로 4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이 무렵은 청년 소비문화를 설명하는 ‘욜로(YOLO)’가 부상한 때와도 겹친다. 욜로는 한 번뿐인 인생에서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 지금의 행복과 경험에 돈을 쓰는 태도다.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17’은 ‘욜로 라이프’를 그해 주요 트렌드로 꼽았다. 이 시기 청년 가구의 빚도 늘었다.
그렇다고 돈 이야기가 다른 목소리를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플렉스가 커진 2017∼2020년에도 내면 감정과 개인적 사유를 합친 비중은 평균 19.6%로, 성장 서사와 플렉스의 합계인 20.7%와 비슷했다. 2019년에는 내면 감정이 10.6%, 개인적 사유가 10.3%로, 둘을 합하면 20.9%에 달했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며 한국 경제는 성장해 왔지만, 2017년 15~29세 청년 실업률은 9.8%로 두 자릿수에 육박했다. 높아진 국가 소득 수준이 청년 개인의 안정까지 보장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까지 겹쳤다.
2021년은 내면 감정과 개인적 사유의 합이 22.8%로 성장 서사와 플렉스의 합계(19.9%)를 앞섰던 때다. 2022년에도 각각 22.5%, 19.7%였다. 불안·우울·고독 등을 담은 ‘내면 감정’만 보면 변화가 더 선명하다. 2017년 7.8%였던 비중은 2019년 10.6%로 높아졌고, 2021년에는 14.6%로 2010년 이후 가장 높았다. 2022년에도 12.2%를 차지했다.사회 현실을 직접 다루는 비중은 줄었다. 1999∼2005년 10.4%였던 비중이 2021∼2025년 평균 3%로 떨어졌다. 사회를 향한 목소리가 작아진 자리에서 성공과 좌절, 불안 등 개인의 경험이 가사의 주요 축으로 남았다. 래퍼 노아차(오세관·29)는 “1세대는 저항정신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면 요즘은 장르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지가 요즘 시대의 힙합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취재=조병욱·배주현·정세진 기자,
사진=최상수 기자, 편집=이대용 기자,
미술=권기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