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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51회) 소리아 : 검은 다이아몬드와 중세의 시간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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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나라 스페인

스페인은 우리나라와 수교한 지 올해 73주년을 맞은 유럽의 전통우호국이다. 과거에는 투우와 축구의 나라로만 알려졌으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요한 유럽 관광지다. 관광뿐 아니라 양국의 경제· 문화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주요한 관심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연재를 통해 켈트, 로마, 이슬람 등이 융합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다.

 

스페인을 오래 다니다 보면 이름난 대도시보다 오히려 조용한 지방의 작은 도시가 오래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n) 동쪽에 자리한 소리아(Soria)가 그런 곳이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한꺼번에 펼쳐지는 곳은 아니지만, 소리아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진다. 오래된 돌담과 성당, 듀에로 강과 숲, 그리고 겨울이면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트러플까지. 소리아의 매력은 강렬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발견하게 한다는 데 있다.

소리아의 겨울을 대표하는 검은 트러플(Trufa negra). 필자 제공
소리아의 겨울을 대표하는 검은 트러플(Trufa negra). 필자 제공

소리아의 겨울을 대표하는 명물은 검은 트러플인 ‘트루파 네그라(Trufa negra)’다. ‘미식의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이 귀한 식재료는 석회질 토양과 추운 내륙성 기후, 참나무류가 어우러진 환경에서 자란다. 겉모습은 울퉁불퉁한 검은 돌처럼 투박하지만, 잘라 보면 안쪽에 섬세한 무늬가 드러나고 특유의 진한 향이 퍼진다. 소리아에서는 겨울철이면 훈련된 개와 함께 트러플을 찾는 관광상품인 트루피 투리스모(trufiturismo)도 즐길 수 있다. 직접 숲을 걸으며 땅속의 트러플을 찾아보는 경험은 미식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트러플의 진가는 강한 맛보다는 향에서 드러난다. 아주 얇게 저며 달걀이나 감자, 치즈 같은 소박한 음식에 곁들이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요리가 된다. 필자가 소리아에서 트러플 요리를 맛볼 때마다 느끼는 것도 비슷하다. 좋은 재료는 많은 것을 더하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역의 레스토랑들은 겨울이 되면 트러플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고, 아베하르(Abejar)에서는 트러플을 주제로 한 축제도 열린다. 이곳 사람들에게 트러플은 값비싼 식재료를 넘어 소리아의 겨울과 숲, 농촌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역 문화다.

다양한 형태의 아치가 이어지는 산 후안 데 두에로 수도원 회랑. 필자 제공
다양한 형태의 아치가 이어지는 산 후안 데 두에로 수도원 회랑. 필자 제공

소리아의 매력은 미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소리아 시내의 산 후안 데 두에로 수도원(Monasterio de San Juan de Duero)에 들어서면 이베리아반도에서 여러 문화가 만나고 섞였던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2세기 교회와 13세기 회랑에는 로마네스크와 초기 고딕, 무데하르 계통의 요소들이 함께 나타난다. 특히 형태가 조금씩 다른 아치들이 이어지는 회랑은 단순하면서도 묘한 리듬을 만든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대립하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던 긴 시간이 이 돌기둥과 아치 사이에 남아 있는 듯하다.

중앙 기둥에서 아치가 퍼져 나가는 산 바우델리오 데 베를랑가 내부. 필자 제공
중앙 기둥에서 아치가 퍼져 나가는 산 바우델리오 데 베를랑가 내부. 필자 제공
카뇬 델 리오 로보스의 바위 절벽 아래 자리한 산 바르톨로메 예배당. 필자 제공
카뇬 델 리오 로보스의 바위 절벽 아래 자리한 산 바르톨로메 예배당. 필자 제공

소리아 남쪽 카시야스 데 베를랑가(Casillas de Berlanga)에 있는 산 바우델리오 데 베를랑가(Ermita de San Baudelio de Berlanga)는 규모는 작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장소다. 겉에서 보면 소박한 석조 건물에 불과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중앙의 굵은 기둥에서 여러 갈래의 말발굽 모양 아치가 뻗어나가 마치 야자수 한 그루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듯한 독특한 공간이 펼쳐진다. 내부에 남아 있는 벽화와 건축 양식에서는 중세 이베리아의 여러 문화가 겹쳐졌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큰 건축물의 웅장함과는 또 다른 감동이다. 작은 공간 하나가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적 교류를 얼마나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연을 좋아한다면 카뇬 델 리오 로보스 자연공원(Parque Natural del Cañón del Río Lobos)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랜 세월 석회암 지형이 침식되며 만들어진 깊은 협곡 사이로 길이 이어지고, 절벽과 숲, 강물이 어우러져 소리아 특유의 고요한 풍경을 만든다. 협곡 안쪽에는 산 바르톨로메 예배당(Ermita de San Bartolom)이 바위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동굴 입구에서 예배당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과 건축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 듯하다. 필자는 이런 곳에 서면 설명을 잠시 멈추게 된다. 여행지에 대한 지식보다 눈앞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을 전해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옛 산타 카탈리나 대학 건물을 활용한 엘 부르고 데 오스마의 역사적 숙박 공간. 필자 제공
옛 산타 카탈리나 대학 건물을 활용한 엘 부르고 데 오스마의 역사적 숙박 공간. 필자 제공

인근의 엘 부르고 데 오스마(El Burgo de Osma)는 중세의 분위기가 잘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성벽과 대성당, 아케이드가 이어지는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시 자체가 하나의 역사 공간처럼 느껴진다. 특히 옛 산타 카탈리나 대학 건물은 오늘날 역사적 건축의 특징을 살린 숙박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스페인 여행을 하며 자주 느끼는 점 가운데 하나는 오래된 건축물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사용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공간에서 머물고 식사하고 사람을 만나는 순간, 문화유산은 더 이상 박물관 속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이 된다.

검은 트러플을 곁들인 소리아의 미식.  필자 제공
검은 트러플을 곁들인 소리아의 미식.  필자 제공

여행의 끝에는 다시 소리아의 맛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접시 위에 얇게 저민 검은 트러플 몇 조각이 올라오자 식탁 주변에 특유의 향이 퍼졌다. 작은 트러플 한 조각이 평범한 음식의 인상을 바꾸듯, 소리아도 스페인 여행에서 처음에는 작고 조용한 지역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만나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검은 트러플이 자라는 숲과 중세의 수도원, 바위 협곡과 오래된 도시가 서로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스페인을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소리아를 권하고 싶다. 유명한 장소를 빠르게 확인하는 여행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그 지역의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함께 이해하는 여행을 하고 싶을 때 특히 그렇다.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