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는 랩이 안 된다고들 했다. 영어처럼 여러 음절이 맞물리는 라임(운율)을 한국어로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 힙합을 하겠다는 청년들 사이에서조차 돌던 시절이었다. 2001년 래퍼 버벌진트(본명 김진태·46)가 내놓은 EP(미니앨범) ‘모던 라임즈(Modern Rhymes)’는 그 통념을 깬 작업으로 꼽힌다.
글로 읽어도 문장이 무너지지 않으면서 영어 랩에 뒤지지 않는 다음절 라임이 한국어로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온 결과물은 아니었다. 그는 1999년 PC통신 나우누리의 힙합 동호회 SNP(Show & Prove)에 가입하기 전, 고등학생 때 이미 집에서 녹음한 ‘하우 하이 스쿨(How High School)’ 등 자작곡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고, 그의 랩은 라디오 전화 랩 대결과 PC통신 게시판을 거치며 힙합 청년들 사이에서 먼저 회자됐다.
‘모던 라임즈’로부터 25년, 그가 만든 문법은 한국 래퍼들의 기본값이 됐다. 그는 디스(상대를 공격하는 랩)전의 한복판에 섰고 쇼미더머니에 출연해 프로듀서로 우승했으며 조용필과 015B의 앨범에 랩을 보탰다. 한국힙합이 비주류에서 주류로 건너온 길을 안팎에서 모두 지나온 셈이다.
세계일보는 한국힙합 30년을 돌아보는 기획의 하나로 지난 8월3일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서 버벌진트를 만났다. 그가 고른 장소는 집 근처의 펍 겸 당구장이었다. 얼마 전 외부 작업실을 정리하고 집 안에 작업 공간을 둔 그는 “지난 9집 앨범 ‘해피 엔드’와 그 전 8집 앨범 ‘K-XY : INFP’의 생각 정리를 저 바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면서 하기도 했다”며 “혼자 와도 아무 부담이 없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에서 그는 PC통신 동호회 시절부터 쇼미더머니, 심부름 앱 아르바이트, 그리고 ‘잔치가 끝난’ 2026년의 한국힙합까지 돌아봤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1편은 AFKN과 라디오에서 ‘모던 라임즈’에 이르는 길, 33년 전 세계일보 칼럼, 그리고 디스전 이야기다. 다음은 일문일답.
◆AFKN과 배철수, 그리고 잡지 ‘서브’
―1998년 KBS 다큐멘터리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에 갱톨릭이 진행하던 라디오에 전화로 참여해 랩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도 그 영상에 ‘여기가 버벌진트’라는 댓글이 달린다. 처음 힙합에 매료된 순간은.
“중학생 때였다. 미군 방송 AFKN, 그리고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주말마다 빌보드 핫100 차트를 중계하듯 들려주던 코너. 그 둘이 가장 큰 영향이었다. 힙합만 뽑아서 들은 건 아니다. 그때 흘러나오던 미국 음악 자체가 되게 많은 자극을 줬는데, 그중 힙합을 꼽자면 노토리어스 B.I.G.가 활동할 때였다. 지금은 언급하기 좀 껄끄러운 이름이 됐지만 퍼프 대디와 함께한 음악은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적 없는 리듬’이었다. 곡은 계속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데 너무나 중독적이었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멋짐’이라는 걸 추상적으로 느꼈다. 비슷한 시기에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라는 그룹도 있었다. 화려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은 음악을 듣다가 ‘이것도 랩인데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네’ 싶었다. 그 둘이 극과 극으로,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직접 곡을 만든 건 언제부터인가.
“역시 중학교 2학년쯤이다. 또래 초등·중학생들이 필수로 다니던 태권도·미술·피아노 학원을 다 가봤는데 태권도와 미술은 금방 때려치웠고 피아노는 계속하게 되더라. 거기에만 재능이 있었던 건지, 아무튼 악기와 친숙해졌다. 기타도 궁금해서 부모님 돈으로 학원에 등록했다. 배우다 보니 ‘이런 게 코드구나, 코드 진행을 이렇게 하면 이런 분위기가 나는구나’ 알게 돼 집에서 혼자 어설프게 작곡을 해봤다. 악보를 보고 그리는 게 익숙했으니 멜로디와 코드 진행을 기록도 했다. 그때는 랩이 아니라 되게 간단한 멜로디가 들어간 노래였다.”
―랩으로 넘어간 계기는.
“고등학교(한영외고) 2학년쯤이다. 힙합도, 같은 시대에 쏟아져 나온 밴드 음악도, 제3의 음악들도 다 좋아했다. 인터넷이 없던 때니 스스로 찾아낸 게 아니라 한국 음악 잡지와 라디오가 소개해 준, 이미 외국에서 유명한 음악들이었다. 재밌는 건 고1 때 미국에 살다 온 1년 선배가 ‘내가 LA에서 데모를 미리 받아 들어봤는데 앞으로 나올 가수다, 죽여준다, 이게 진짜 힙합이다’라며 테이프를 들려준 일이다. 유승준씨의 데모였다. ‘진짜 웨스트코스트 힙합’이라는 말도 알아들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로 닥터 드레와 스눕 독을 알고 있었으니까. 1996∼97년쯤 홍대 근처에서 밴드들의 움직임과 함께, 그보다 훨씬 작았지만 랩을 하려는 사람들도 꿈틀꿈틀 모여 공연을 시작했다. 호기심에 밴드 공연도, 래퍼 공연도 보러 다녔다. 그 모든 자극이 ‘멋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그래서 직접 랩 가사를 써보게 됐다.”
―처음 완성한 곡이 ‘하우 하이 스쿨(How High School)’인가.
“고등학교 때 공책에 만화 낙서하듯 ‘이렇게 하면 미국 랩처럼 라임이 되는 건가’ 하며 쓴 습작은 엄청 많다. 녹음까지 해서 완성한 건 ‘하우 하이 스쿨’이 처음이다. 정말 조악한 음질과 편곡이었지만 당시 유일하게 갖고 있던 멀티트랙 레코더와 집에 있던 싸구려 기타로 녹음했다.”
―라디오에는 어떻게 전화하게 됐나.
“그보다 먼저 신기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서브(SUB)’라는 음악 잡지가 있었다. 헤비메탈 중심이던 이전 잡지들과 달리 한국 사람 귀에 잘 안 들리는 비주류 음악을 골고루 다루던, 일종의 얼터너티브 음악 잡지였다. 거기서 불특정 다수에게 데모곡을 받아 선정한 10곡 정도를 매달 CD 별책부록으로 만들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집에서 처음 녹음한 ‘하우 하이 스쿨’을 CD로 구워 응모했는데, 다음 호 부록에 실렸다. 고3 때였을 거다. 거기서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갱톨릭이 진행하던 라디오 코너의 전화 랩 대결에 전화를 걸었다. 청취자 두 명이 전화로 1대1 랩 대결을 하면 되게 진지하게 심사해 이긴 사람에게 문화상품권을 주는 코너였다. 자신감이 있었는지, 뭔가 인증을 받고 싶었는지 용기를 냈다. 지금 생각하면 닭살이 돋지만 그때 짠 가사와 플로우(랩의 리듬과 흐름)가 독특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지금 쓰는 것과는 다르지만 나름의 새로운 라이밍이라고 느껴지는 게 있었나 보다. 좋게 평가해 주셔서 너무 기분이 좋았고, 그 일도 이후 본격적으로 그런 기술을 추구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나우누리 SNP, 아이디로만 알던 몇 달
―나우누리 힙합 동호회 SNP에는 어떻게 들어갔나.
“PC통신을 되게 늦게 했다. 1999년 대학생(서울대 경제학과)이 되고 나서였으니 거의 끝물이었다. 음악과 관련해 더 자극을 받을 공간이 없을까 찾았다. 요즘이야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 얘기할 채널이 너무 다양하지만 그때는 PC통신이 통로일 것 같았다. 나우누리를 고른 건 뭘 미리 알고서가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였다. 그런데 나한테는 너무 행운이었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동호회가 여러 개 있었고, 그중 본능적으로 끌려서 SNP를 골랐다. 들어가 보니 ‘이번 앨범 좋네요’ 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게시판도 있고, 집에서 녹음하고 작곡한 작품을 올리는 게시판, 요즘 말로 자녹게(자유녹음게시판)도 있었다. 어떤 분들은 되게 신선한 자료를 줬다. 여기서 많은 자극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회원들은 아이디로만 서로를 알았다.
“내 기억에 첫 시삽(동호회 운영자)은 데프콘 형이었고, 피타입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채팅방과 게시판에서만 얘기하고 자작곡을 들어볼 뿐 얼굴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몇 개월을 지냈다. 재밌었다. 고등학교 때 ‘이런 식으로 써야 랩이 작품이 되는데, 이렇게 해야 라임이 되는데’ 생각했던 걸 이미 하고 있는,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다.”
―1999년 6월 첫 정모(정기모임)에서 ‘하우 하이 스쿨’을 공연했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당시 회원들은 기억한다.
“그런 건 어떻게 아셨나(웃음).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인생 첫 경험이었다. 이미 게시판에 곡을 올린 상태라 다들 서로를 궁금해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뭐 하는 사람일까, 어떤 분위기일까. 자기 곡 하나씩 갖고 와서 할 사람은 하고, 창작하지 않는 회원은 와서 같이 즐기는 게 정해진 절차였다. 반향을 일으켰다면 그건 곡이 아니라 외모, 그러니까 행색 때문이었을 거다. 곡은 이미 게시판에서 다 들어본 뒤였으니까. 전혀 힙합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갔다. 그날 본 다른 사람들은 당시 힙합 패션 코드에 충실한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나왔다. 아비렉스 재킷, 팀버랜드 부츠, 되게 넓은 바지, 농구 저지, 삭발한 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나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대학교 1학년 차림이었다. 그런 걸 몰랐다.”
◆“된다, 된다, 이것도 된다”
―‘한국어는 랩이 안 되는 언어’라는 말이 있었다. ‘모던 라임즈’는 그 통념을 깬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어로도 다음절 라임이 ‘된다’고 처음 느낀 순간은.
“게시판에 올렸던 곡이 서너 곡 있다. ‘하우 하이 스쿨’, ‘빅 브레이크’, ‘반칙’. 곡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가능성을 더 크게 보게 됐다. 조금만 더 정리하고 조금만 더 고민하면 미국 힙합에서 들었던 청각적 미학이 한국어로도 거의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SNP에서 만난, 나와 비슷하게 ‘한국어로 라임이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과 서로 자극을 주고받았고 그들의 창작물을 보며 자극받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 더 정제된 형태, 그냥 글로 가사를 읽어도 문장이 파괴되지 않으면서 영어로 랩하는 것에 뒤처지지 않는 라이밍 구조를 어느 정도 구사하게 된 게 ‘모던 라임즈’ 작업할 때쯤이다. 수록곡의 주제는 제각각인데, 그 라이밍은 다 지키면서 한국어로서도 파괴되지 않는 벌스(랩의 절) 세 개짜리 곡. 그게 가능해진 게 2001년이다. 그전에는 나도 그만큼 쓰지 못했다.”
―지금 활동하는 래퍼들은 그 정도 라임을 당연하게 쓴다. 후배들의 가사에서 그때 만든 문법이 들리면 어떤 기분인가.
“특정한 감회를 느낀 건 이미 12∼15년 전이다. 내가 20대 초반에 낸 것, 그리고 그 무렵 사람들이 ‘한국어로 라임이 된다, 안 된다’ 싸우기도 하면서 만들어놓은 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렸을 때부터 그걸 듣고 자란 세대가 다음 힙합의 주역으로 올라오는 걸 본 게 2010∼2015년 사이쯤이다. 그때 이미 ‘이게 기준이 됐구나’ 했다. 기준이라는 말도 좀 어색하다. 한국어 라임이 어렵다, 라임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이게 그 예술 형식의 미학이구나’를 다들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알고 자라서, 이제는 각자 스타일대로 아예 갖고 놀더라. 10년도 넘은 얘기다. 지금은 감회도 없다. 너무 당연한 게 돼버려서.”
◆33년 전 칼럼을 읽다
(기자는 1993년 6월27일자 세계일보 ‘설왕설래’ 칼럼을 건넸다. 힙합을 ‘저질 외래풍조’라 부르며 “흑인처럼 꼰 머리를 하고 헐렁한 옷을 입는 유행을 흉내 내지 말아야 한다”고 썼고, KBS가 레게 머리를 이유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연을 막은 것을 잘한 결정이라고 평가한 글이다. 그는 한참을 집중해 읽었다.)
―당시 10대였다. 지금 이 글을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일단 기사가 너무 재미있다(웃음). 중간에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다른 문화의 요소를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흑인들이 한국의 판소리를 하면 바람직하지 않듯 우리도 그들의 것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어떤 사람이 낯선 문화를 처음 접하고 그것이 왜 지지받는지 이해가 안 될 때, 시대에 상관없이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응이 유독 힙합에 강했던 이유는 뭘까.
“단편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한국에서 팝 음악을 좋아하고 외국 음악을 많이 듣던 사람들이 저 시기까지는 묘하게도 흑인 음악의 존재를 지워왔던 것 같다. 내 착각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듣던 음악 상당수가 사실 흑인 뮤지션들이 없었으면 탄생하지도 않았을 음악인데, 매체도 듣는 사람도 그 부분을 애써 안 보면서 팝 취향을 가져왔다. 마이클 잭슨은 들었으면서 그게 블랙 뮤직이라는 건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미국에서 1980년대부터 랩 음악이 차트에 오르고 TV를 켜면 볼 수밖에 없는 문화가 되면서 한국까지 넘어왔다. 힙합도 블랙 뮤직이다. 형식이 좀 더 급진적이고 새로웠을 뿐이다. 지금까지 많이 들어온 음악의 뿌리에 흑인들이 만든 음악이 다 포함돼 있는데, 그냥 화들짝 놀랐던 게 아닐까. 흑인 음악이라는 걸 무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좀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편일 수는 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2000년대에도 주류의 시선은 곱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주류에서 인정받고 싶다거나 주류와 부딪힐 일이 없었다. 희망하지도 않았다. 음악 만들고 가사 만들고 라임 구조를 만들면서 ‘된다, 된다, 이것도 된다’ 하는 즐거움이 너무 컸다. ‘그게 무슨 음악이냐’, ‘가사가 왜 그러냐’, ‘디스는 왜 하냐’는 말을 직접 들을 기회는 잘 없었다. 사회 전반의 편견은 기억한다. 공연장에서 랩 음악을 하고 있으면 ‘저거 음악 같지도 않고 잘 들리지도 않고, 그냥 미국 흑인들처럼 보이는 겉멋 때문에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말들. 내게 직접 한 게 아니라 주변인, 학교 동기들이 그렇게 봤다. 제대로 된 걸 안 들어봤거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 경기가 된 음악, 디스전
―한국힙합 디스의 역사에서 버벌진트를 빼놓을 수 없다. 2000년 4WD와 주고받은 ‘노자’ 시절부터 따지면 거의 30년이다. 디스 문화가 한국힙합에 남긴 건 뭔가.
“대한민국 대중음악에 없었던, 진짜 스포츠 경기 같은 측면을 음악으로 보여줬다. 처음 디스곡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이었을 거다. 랩을 만드는 크래프트(작법·기술) 측면의 경쟁이 한 축이고, 진짜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이 또 다른 축이다. 그렇게 탄생한 디스곡도 한국에 충분히 많다. 남긴 것이라면, 이게 미국 힙합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한국도 자연스럽게 본능 속에 그것을 갖고 있구나,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흥분이 때로는 씬(활동 무대) 전체의 관심과 돈을 불러오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 그리고 혁신적이고 잘 만든 음반들이 다음 세대가 참고하는 원천이 되듯, 치열하게 이뤄진 디스전 역시 음악적 자극을 줬다고 본다. 다음 세대가 디스전을 배워서 한다는 뜻이 아니다. 디스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음악적 에너지가 있다. 그건 힙합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②편 ‘쇼미더머니, 심부름 앱, 그리고 잔치가 끝난 힙합’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