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아리는 바다의 강력한 포식자 중 하나로 공포의 대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죠스'(1975)의 모델이기도 한 백상아리의 크기는 약 4~5m에 이른다. 단 한입에 거대한 바다사자와 돌고래 등을 먹어 치운다.
그 이상의 포식자도 존재한다. 범고래다. 영화에서 보여지듯, 수족관에서 인간 지시에 따라 온갖 묘기를 부리는 온순한 범고래들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야생의 그들은 높은 지능을 이용해 바다사자, 돌고래 등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한다.
이 무시무시한 포식자들의 대결을 다룬 영화도 있었다. 1977년 개봉한 '오르카'다. 영화 초반에 인간을 사냥하려는 거대한 백상아리를 범고래가 나타나 물리치고 인간을 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선 범고래의 완승이었다.
실제로 두 포식자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기게 될까. 영화의 예측은 맞아떨어질까.
실제 수중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인 범고래와 백상아리는 조우하기도 한다.
2017년 5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근처 해안에서 백상아리 사체가 발견됐다. 암컷인 이 상어의 무게는 1t이 넘었는데, 뱃가죽이 갈라져 있었다. 그 안에서 90㎏ 크기의 간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다섯 달 후 똑같은 백상아리 사체 5구가 연이어 발견됐다. 모두 간이 적출된 상태였다.
수중에서 무언가 거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17일(현지일간) 볼리비아 일간 엘데베르와 영국 BBC 방송의 스페인어판(문도)에 따르면 당시 상어 부검을 지휘했던 엘리슨 타우너 연구팀은 오랜 조사 끝에 상어 연쇄살해범을 지목했다. 형제로 추정되는 한 쌍의 범고래였다.
2022년 드론으로 촬영된 영상에 따르면 세 마리의 범고래는 케이프타운 인근 바다에서 백상아리 한 마리를 협공했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주둥이를 이용해 상어를 수면 위로 밀어 올린 뒤 오른쪽 옆구리가 드러나도록 뒤집었고, 곧이어 간이 위치한 가슴지느러미 인근을 물어뜯었다.
이어 다른 범고래가 상어를 입에 문 채 물속으로 잠수했고, 또 다른 범고래는 상어의 꼬리 부분을 붙잡는 듯하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완벽한 팀플레이였다.
범고래와 백상아리의 충돌은 케이프타운 인근 바다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최근 수년 사이 미국 캘리포니아, 멕시코 태평양 해안, 호주 해안에서도 범고래가 백상아리를 사냥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그리고 이들의 사냥 목적은 영양가가 듬뿍 담긴 상어의 간이었다.
백상아리는 장거리를 이동하거나 무거운 몸을 부력으로 지탱하기 위해 간에 에너지를 비축한다. 다 큰 개체의 간은 체중의 28%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다.
상어를 상대하는 범고래의 최대 무기는 압도적인 체급과 협공 전략이다. 길이가 8~10m, 무게가 10t에 이르는 범고래는 최대 6m, 무게 2t에 달하는 백상아리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 여기에 높은 지능을 바탕으로 '방언'을 구사하며 소통하는 범고래는 뛰어난 사냥 전략을 구사한다. 단독 행동하는 백상아리가 적수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설사 일대일 승부라고 해도 범고래의 완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2023년 6월에는 범고래 한 마리가 2.5m 크기의 어린 백상아리를 공격해 2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간을 적출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그다음 날에도 인근 해안가에서 3.5m 크기의 백상아리 사체가 간이 적출된 채 발견됐다.
멕시코 해안에서도 범고래의 '백상아리 사냥'은 목격됐다. 5마리의 범고래는 상어를 밀어붙여 수면 위로 띄워 올린 후 뒤집어버렸다. 상어를 뒤집는 행동은 이른바 '인모빌리티 토니카'라 불리는 마비 상태를 유발한다. 상어는 거의 1분 동안 마비된 채 무방비 상태에서 범고래의 날카로운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의 야생동물 전문 해양 생물학자 에릭 이게라는 이런 사냥 전략이 학습된 행동이라고 BBC에 밝혔다. 그는 이런 사냥 기술이 "가족 내의 문화적 학습에 해당하며, 우두머리 암컷으로부터 전수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2023년 10월에는 호주 남동부 해안가에서 4.7m에 이르는 거대한 백상아리 사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역시 간이 유실된 상태였다. 조사를 이끈 해양 생물학자 리브스는 "상처 부위에서 범고래의 DNA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기후 변화 등의 요인으로 두 종이 점점 더 가까이 마주치게 되면서 과학자들은 주요 최상위 포식자 간에 벌어지는 이 싸움이 해양 생태계에 극단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고 경고한다.
2015년까지 안정적인 백상아리 개체군이 기록됐던 케이프타운의 '펄스만'에서는 2018년이 되자 거대한 백상아리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범고래의 출현이 이 개체수 급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범고래 무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파랄론 섬에 출몰하자 백상아리들이 돌연 사라지기도 했다. 전자 추적 데이터에 따르면 대다수 상어는 범고래가 도착한 지 몇 분 만에 해당 구역을 떠났고 다음 시즌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백상아리가 대거 도주했던 동안 코끼리물개에 대한 상어들의 공격 건수는 평상시에 견줘 4~7배 급감했다.
해양 생물학자 타우너는 상어의 이러한 도주 행태를 아프리카 들개에 비유했다. 그는 "사자가 나타나면 들개는 아예 서식지를 떠나버린다"며 "백상아리가 자신들의 영토에 난생처음 나타난 다른 최상위 포식자에 반응하는 모습이 들개들과 매우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백상아리의 이동은 생태계에도 커다란 연쇄 효과를 낳고 있다. BBC 문도는 펄스 만에서 거대한 백상아리가 사라지면서 먹이사슬에 연쇄 반응이 일어나 상어의 주식이었던 남아프리카 물개와 칠아가미상어의 개체수가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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