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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의 의사 되기, A to Z [조선생활실록(實LOG)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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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천 통해 의관생도 돼도
3년마다 의과로 9명 선발
평생 생도로 마치는 이도
어의 추천에서 집안 중시
소수 집안에서 어의 배출

방년 열두 살인 변 아무개 군, 오늘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옷을 말끔하게 입고 집을 나섰다. 변군의 할아버지가 사신단 통역관으로 청나라에 갈 만큼 출세했기에, 변군은 남부럽지 않게 유복하게 잘 살아온 터였다. 허생전 변씨 부자의 모델이 되었다는 집안의 어른은 그의 자랑이기도 했다.

 

오늘은 변군이 전의감 의학생도로서 첫 등교하는 날. 의료관청인 전의감은 완천(完薦) 제도라는 불리는 방식으로 생도를 뽑았다.

1778년 저술된 『혜국지』에서 생도가 되는 과정을 설명한 부분. 또 의료 관청 혜민서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778년 저술된 『혜국지』에서 생도가 되는 과정을 설명한 부분. 또 의료 관청 혜민서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변군은 완천을 위해 부모의 가계를 조목조목 쓴 문서 단자를 아버지의 절친이던 이 주부의 보증을 받아 제출했다. 실세인 현직 관원의 보증에다가, 역관과 의관 출신의 전현직 관료가 많은 집안 배경이 더해졌다. 생도를 뽑기 위한 전의감 전함청 투표에서 그는 일사천리로 입속 허락을 받았다. 그 투표에 참여한 전의감 소속 관리 가운데 몇몇은 변군을 이전부터 알았다.

변의원을 언급하고 있는 정조 임금의 어찰로 밀양변씨 효량공파는 역관과 의관을 다수 배출한 집안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변의원을 언급하고 있는 정조 임금의 어찰로 밀양변씨 효량공파는 역관과 의관을 다수 배출한 집안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변군은 이런 ‘지인 찬스’가 꼭 부당한 것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는 전의감에서 근무하는 외삼촌 등 친척들을 통해 어릴 때부터 도제식으로 의료 지식을 배웠다. 변군이 만약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면, 의료 지식을 선행 학습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다만, 완천을 통과했다고 바로 생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생도에 결원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얼마 전 의과 시험이 있어 생도 일부가 관원이 되었다. 선배 생도가 만들어준 결원 덕분에 변군은 정식 생도가 될 수 있었다.

1881년 전의감생도에 결원이 생겨 이중환은 생도가 될 수 있었다. 생도는 의관이 되는 첫걸음이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81년 전의감생도에 결원이 생겨 이중환은 생도가 될 수 있었다. 생도는 의관이 되는 첫걸음이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의학생도는 사관생도와 비슷했다. 생도 가운데 총명하고 기술이 민첩한 우등생은 ‘총민’으로 선발되어, 특별 교육을 받았다. 변군도 총민을 바랐으나, 그러러면 분기별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아야 했다. 시험 점수가 낮으면 사비로 ‘종이’를 사서 내거나, 아주 낮으면 생도 명부에서 제적했다.

 

변군의 사촌 형은 의과에 합격했다. 그는 사촌 동생 변군에게 우리 집안 출신이면 당연히 우등생으로 뽑혀 붓과 종이를 상으로 받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또 그는 방심하지 않도록 의과의 난이도가 몹시 높다고도 조언했다.

 

의과는 3년마다 주기적으로 보는 식년시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증광시가 있었다. 가을에 예비시험인 초시로 18명을 뽑았다. 다음 해 봄에 본고사인 복시를 통해 9명을 최종 선발했다. 선발 인원이 이처럼 적었기에 평생 생도로 남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실력을 인정받아 의관에 임명되더라도, 정식으로 의과에서 급제하지 못하면 6품 주부(主簿) 이상 승진할 수 없었다. 의관의 로망은 왕실 주치의 곧 어의였다. 어의가 되려면 내의원 의관이 되어야 했다. 내의원 의관의 필수 자격이 바로 의과 급제였다. 

의과와 취재 시험 과목이었던 『동인경』으로, 시험관 앞에서 암송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의과와 취재 시험 과목이었던 『동인경』으로, 시험관 앞에서 암송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의과는 이처럼 고위직으로 가는 출세의 사다리였다. 반면 하급 관리의 임용을 위한 시험도 있었다. 바로 취재다. 취재는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연 두 차례 시행했다. 취재는 전직은 물론 현직 의료 관원, 그리고 생도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 시험 점수로 선발하니, 이른바 인성이나 실무 능력이 반영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취재는 하급관원의 임용 길을 터주는 작용도 했으나, 전문 분야 종사자의 신분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었다.

 

정조는 취재의 부작용을 없애고자, 전의감에 등제청을 만들었다. 등제청은 평소 보였던 실무 능력으로 하급 관리를 선발했다. 이로써 능력 있고 성실한 이들이 꼭 취재가 아니더라도 자리를 보장하는 길이 열렸다. 등제청에 선발된 인원은 의관을 임명하는 인력풀로 기능했다.

 

내의원 내의와 어의가 되는 최종 관문은 추천이었다. 특히, 어의는 가문을 중시했다. 대대로 어의를 지낸 집안 출신을 중요한 잣대로 삼았다. 물론, 추천은 시험보다 공정성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면 가정에서 어의 출신 인척에게 교육받아 온 인재와, 내의원 내에서 검증된 경력직을 채용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1741년 내의원에서 제작된 침구동인으로, 의학생도와 의녀들이 혈을 학습하는 주요한 부교재였다. 국립고궁박물관
1741년 내의원에서 제작된 침구동인으로, 의학생도와 의녀들이 혈을 학습하는 주요한 부교재였다. 국립고궁박물관

변군은 완천을 잘 통과해 전의감 의학생도가 되었다. 만약, 그가 정형화된 경로를 밟았다면 취재를 거쳐 하급 의학관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의과에 합격해 정식 의관이 되고, 내의원 의관으로 활동하다가 그 실적에 따라 어의가 되었을 터였다. 변군이 어의가 되었다면, 그의 후손도 의관이 되는, 이른바 ‘사다리’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52)

 

박훈평 동신대학교 한의예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