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거점 온라인 사기 범죄에 가담한 청년들은 피해자이면서 피고인이라는 ‘이중적 지위’에 놓인다. 인신매매와 감금·협박, 통장 갈취 등 강압적 상황을 겪었더라도 범죄 가담 사실이 확인되면 처벌을 피하기는 어렵다. 인신매매방지법 등에 강제노동 피의자의 형 감면 규정이 있지만, 정작 수사기관에서 피해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점검할 시스템은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최동일(가명)씨의 변호인 오상은 변호사는 피해자 강선우(가명)씨와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스캠 가담 청년들의 이중적 지위를 절감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강씨는 한 재판에서 해외 취업 사기와 감금·폭행, 계좌 탈취 등의 피해자로 인정됐지만, 다른 재판에서는 같은 계좌를 범죄에 쓰일 줄 알면서 넘겼다는 이유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사람과 계좌를 두고 한쪽에서는 피해자로, 다른 쪽에서는 범죄자로 판단한 셈이다.
오 변호사는 올 8월13일 인터뷰에서 “해외 스캠 범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지위가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 경우가 다수 있지만,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범죄 피해자가 체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외라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공간에서 지속적인 폭행이나 협박을 받으며 범죄에 가담한 경우라면, 단순히 가해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강제노동이나 인신매매 피해자로서 이중적 지위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법률에 형 감면 규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국제사회는 인신매매 피해자가 강제된 상황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처벌을 제한하거나 면제해야 한다는 ‘비처벌 원칙’을 강조한다. 유엔 인신매매방지 의정서와 국제노동기구(ILO) 강제노동협약의 취지도 피해자의 강압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국내 인신매매방지법 4조 2항에도 피해자의 범죄에 대한 형 감경·면제 규정이 있지만, 오 변호사는 “실제로 형이 감경되거나 면제된 사례는 찾기 드물다”고 했다.
문제는 스캠 범죄에 가담한 청년들 대부분이 수사와 재판에서 “불법인지 몰랐다”, “감금당했다”고 항변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를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범죄단체들이 조직원 검거에 대비해 ‘관광 목적으로 출국했다가 납치됐다’, ‘정상적인 취업인 줄 알았는데 감금됐다’는 식의 대응 대본을 조직원에게 교육하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자의 진술과 구분하기 어려운 탓에 수사기관과 법원 모두 쉽게 믿지 않는다.
오 변호사는 “범죄전력이 없는 사람이 정상적인 취업이라고 속아 출국한 뒤 자유의사를 억압할 정도의 폭행·감금·고문 또는 은닉을 당한 사람이라면, 형 감면을 위해 구체적인 피해 경위를 객관적인 자료와 정황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면서도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제약됐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범죄단체들의 유인 수법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특히 구인 광고 내용이 한층 교묘해졌다. 과거에는 이른바 ‘하데스 카페’ 등 온라인 구인·구직 게시판을 통해 정상적인 취업인 것처럼 속였다면, 최근에는 “5성급 호텔 숙식 제공”, “주당 400만원 보장” 같은 조건을 내건다. 국제 스캠 조직의 실태가 알려지자 불법성을 완전히 숨기기보다 “검거돼도 처벌을 피하거나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는 검증된 대본을 제공한다”며 안심시키는 식이다. 오 변호사는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더라도 이를 감수할 만큼 큰돈을 벌 수 있고, 문제가 생겨도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방식으로 유인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의자들이 강압과 착취 사실을 호소해도 수사기관이 이를 세심히 살피지 못한다는 지적이 크다.
3월 국회에서 열린 ‘캄보디아 청년 인신매매 사건, 청년의 선택인가 구조적 강제인가’ 토론회에선 이러한 문제 제기와 함께 해외 스캠 관련 송환자에 대한 표준화된 피해자 식별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토론자로 나선 이지영 변호사(법률사무소 노을)는 캄보디아에서 협박을 당했다고 진술한 피의자에게 경찰관이 “그럼 나도 협박당했다”며 빈정거렸다는 사례를 소개했다. 피고인의 진술은 수사기록에 불리하게 남았고, 법원은 “형법 12조의 ‘강요된 행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스캠 피해와 범죄 가담 여부에 집중한 나머지 취업 사기와 감금·협박 정황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출국 경위와 범죄 인식 시점, 협박의 정도와 지속 기간, 탈출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선명하게 나누는 이분법으로는 ‘구조적 강압’을 놓칠 수 있다는 것.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유지하면서도 피해자 식별과 권익보호기관의 사례 판정회의를 활성화하고, 수사기관·외교부·현지 경찰 간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초국가적 스캠 범죄를 뿌리 뽑으려면 범죄 가담 여부뿐 아니라 그 이면의 강제와 착취까지 함께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 변호사는 “수사 초기부터 피의자가 동시에 인신매매나 강제노동의 피해자일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면, 경찰이나 검찰 단계에서 송치나 기소 여부를 판단할 때 그 사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