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 모로코에 최초로 탄생한 여성 총리가 내각 구성 절차를 마치고 경제 발전 등 국정 과제를 발표했다. 입헌군주국이자 의원내각제 국가인 모로코에서 외교·국방 등은 국왕이 직접 관장하고 총리는 민생 등 내정 분야를 주도한다. 다만 영국, 일본 등과 비교하면 왕권이 훨씬 세고 총리의 영향은 제한적이다. 그 때문에 여성 총리 등장을 반기는 모로코 여성들조차 그의 임기 동안 여권(女權)의 획기적 신장이 이뤄질 것인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20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 BBC 방송 등에 따르면 파티마 에자흐라 엘만수리(50) 신임 모로코 총리가 전날(19일) 의회에 출석해 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국정 비전을 밝혔다. 앞서 지난 16일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은 엘만수리 총리가 제청한 장관 후보자들을 공식 임명했다. 전직 국토계획 담당 장관이자 마라케시 시장인 엘만수리가 모하메드 6세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것은 지난 9월29일이다.
이날 엘만수리는 오는 2027∼2031년 5년간 연평균 5%의 경제 성장을 새 정부의 목표로 제시했다. 그는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이하로, 물가상승률은 구매력과 경제 안정을 위해 2%로 각각 유지하려 한다”며 “취약 계층 가구에 대한 직접적 사회 지원을 늘리고 식품 가격도 낮추겠다”고 다짐했다.
부친이 외교관인 엘만수리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모로코는 물론 프랑스, 미국 등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 자격 취득 후 정계에 뛰어들어 모로코의 유력 도시인 마라케시 시장을 지냈다. 마라케시에서 여성 시장이 선출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지난 9월 모로코 총선에서 엘만수리가 이끄는 자유주의 성향 신뢰현대당(PAM)이 총 395석 중 97석을 차지하며 1당이 됐다. 선거 후 PAM은 다른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 구성 협상에 나섰으며, 마침내 원내 과반에 해당하는 207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관건은 모하메드 6세가 과연 여성인 엘만수리를 총리로 임명할 것인지에 쏠렸다. 이제껏 아랍권 국가들에서 여성 총리가 배출된 사례는 튀니지의 나즐라 부덴(2021년 10월∼2023년 8월 재임)이 유일하다. 이슬람에는 ‘여성에게 권력을 맡긴 민족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모하메드 6세가 엘만수리 총리 지명 카드를 밀어붙이자 보수 진영에선 “여성이 국가 최고 직위를 담당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이들은 “국왕의 선택인 만큼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반발은 자제하는 모습이다.
모로코는 남녀 차별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 재산을 상속할 때 딸들은 아들 몫의 절반가량만 받을 수 있다. 몇 가지 제한을 두고 있지만 일부다처제도 여전히 합법이다. 특히 아내가 난임이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 남편은 다른 여성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 이 모두는 불평등한 현행 가족법이 근본 원인이다. 모로코 여성들은 엘만수리가 가족법 개정을 강력히 추진하길 기대하고 있다.
엘만수리는 총리 취임 직후 “모로코 역사상 첫 여성 정부 수반이라는 점은 저뿐만 아니라 왕국의 모든 여성들에게 자부심이 될 것”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다만 가족법 개정 추진 계획에 관해선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여성계에선 엘만수리가 특권층의 딸이란 점을 들어 “사회의 실질적 개혁보다는 외부에 ‘모로코는 현대화하고 진보적인 나라’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치중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