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가난을 극복했고, 병마를 이겨냈으며, 누구나 질 것이라 생각했던 선거에서 끝내 승리했다. 오뚝이처럼 넘어질 만하면 다시 일어나는 정치인, 브라질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81) 얘기다.
룰라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치러진 브라질 대선에서 통산 4선에 성공했다. 그는 21세기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이미 남미를 대표하는 유력 좌파 정치인이었다.
브라질 정계에서 수십 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번 대선에서 맞붙은 플라비우 보우소나루와는 달리 날 때부터 높은 지위가 보장된 유력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자손, 즉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 출신이었다.
룰라가 어릴 때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그의 부모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브라질 최대 경제 도시 상파울루로 이주했다. 룰라가 태어난 북동부 페르남부쿠주는 가난한 지역으로 정평이 난 곳이었다.
앉아서 코 베이기 쉬운 도시의 삶은 천생 농민이었던 룰라 부모에게는 버거웠다. 부모에게 투정 부릴 7세의 나이, 막내아들이었던 룰라는 그런 부모를 돕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7세 때부터 밥벌이를 시작한 그는 땅콩 장사와 구두닦이를 하며 글 대신 거리에서 '눈치'를 익혔다. 10살 때까지 어린 룰라는 읽고 쓸 줄도 몰랐다고 한다.
간신히 글을 뗀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후 14세부터 상파울루 인근 상베르나르두두캄푸 지역의 한 금속업체에서 공장 근로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9세 때인 1964년, 작업 중 사고로 그는 왼쪽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5년 뒤에는 함께 공장을 다녔던 첫 부인과 사별했다. 당시 부인은 임신 상태였고, 산업 재해성 질병을 앓고 있었다. 룰라는 치료비가 없어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간 켜켜이 쌓였던 사회에 대한 불만은 부인의 죽음으로 폭발했다.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뜬 룰라는 이후 노조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각을 나타냈다.
1975년 10만명의 노조원을 둔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앞장서며 구속과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잇따른 파업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80년엔 상파울루시 인근 3개 지역 노조가 참여한 브라질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을 주도하면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1980년 초 산별노조와 좌파 지식인들을 규합해 노동자당(PT)을 창당한 룰라는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4년부터 대통령 직선제 쟁취 투쟁에 매진한 그는 1986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데뷔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1989년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룰라는 노동자당 후보로 나섰으나 페르난두 콜로르에게 패했고, 1994년과 1998년 대선에서도 보수파 후보에게 연이어 무릎을 꿇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는 마침내 3전 4기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내친김에 2006년에는 연임에 성공했다. 경제성장을 견인하면서 빈민 구제에도 성과를 내 2010년 임기를 마친 뒤 물러날 당시 그의 지지율은 80%대에 달했다.
그러나 퇴임 후 측근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비리가 터졌다. 그는 뇌물수수와 돈세탁 혐의로 2016년에 구속된 뒤 이듬해 1심에서 9년 6개월, 2018년 2심에서 12년 1개월의 징역형을 받아 590일 동안 옥살이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끝난 듯 보였다. 게다가 여러 차례의 암과 항암 치료로 신체가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감옥에서 귀환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룰라는 다시 세를 규합해 2022년 대선에 재도전, 군인 출신의 강경 우파 지도자 자이르 보우소나루 당시 대통령을 꺾고 다시 대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룰라의 패배를 예상한 이번 대선에서도 그는 1차 투표 패배를 이겨내고 자이르의 전 대통령의 아들 플라비우 보우소나루를 결선에서 꺾으면서 통산 4선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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