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프랑스의 위기와 세종의 ‘무간피차’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다양성 억누르면 통합 깨지고 결국 분열로
공동체로 묶는 힘은 공정한 대우와 규범

최근 프랑스의 시위 사태를 보면서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정체성’에서 “오늘날의 프랑스가 프랑스일 수 있는 것은 다양성의 승리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는 본래 언어와 관습, 향토 문화가 모자이크처럼 얽힌 나라였다. 17세기 이후 중앙집권화가 추진되고 ‘단일하고 불가분한 공화국’이라는 원칙이 확립되었지만, 다양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브로델은 이를 “밟을수록 더 끈질기게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했다(안옥청 외 번역, 74쪽).

그렇다고 다양성만으로 프랑스가 유지된 것은 아니다. 브로델은 다양한 모자이크 조각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시멘트’로서 ‘프랑스의 정신’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 혈통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주는 공통의 기억과 가치, 제도와 규범이 그것이다. 19~20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 폴란드 등에서 온 이민자들도 자신의 뿌리를 간직하면서 프랑스어와 공교육, 공화국의 시민적 규범을 받아들였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오늘날 프랑스의 위기는 이 시멘트의 접착력이 약해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는 시민의 평등을 내세우지만 현실에서는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일부 이민자 집단은 세속주의와 양성평등, 표현의 자유 같은 공화국의 핵심 가치를 거부한다. 국가의 구심력은 약해지고 사회 내부의 원심력은 강해진 것이다.

다양성을 억누르면 통합이 깨지고, 공통의 가치를 잃으면 다양성은 분열로 바뀐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 말에 폐쇄적인 골품제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비롯한 지방 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가로막으면서 통합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반면 해방 정국(1945~1948)에서는 서로 다른 이념을 조율할 공통의 규범과 정치적 합의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대립과 폭력이 발생했다.

이와 달리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든 지도자도 있었다. 세종이 그 예다. 그는 “하늘이 만물을 기를 때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듯, 백성을 사랑함에도 내 편과 네 편을 가려서는 안 된다(無間彼此·무간피차)”고 강조했다(세종실록 21년 5월14일).

물론 세종의 개방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1446년(세종 28년) 집현전 학사 이선로는 한나라처럼 국경을 닫고(閉關·폐관) 방비를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흉년으로 나라의 재정이 어려운데 외국 사신들의 요구는 끝이 없고, 내부 사정이 알려지면 외침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경제적 부담과 안보 위협을 내세운 쇄국의 논리였다.

그러나 의정부 대신들은 “남쪽 왜인과 북쪽 오랑캐 중에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자가 심히 많은데, 한나라처럼 국경을 닫을 수는 없다”며 반대했다. 세종 역시 “이웃 나라 사람들을 포용하고 함께 살아갈 방책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의 큰일”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세종시대에는 일본과 여진, 중국과 남방 지역에서 귀화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종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 위구르계 귀화인의 후손 설순은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삼강행실도’ 편찬에 참여했고, 일본 출신 평도전은 상호군에 올라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장영실 역시 외국 출신 아버지를 둔 인물이었다.

세종의 포용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었다. 출신에 따른 차별을 넘어 조선의 법과 질서 안에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힘은 배제가 아니라 공정한 대우와 공동의 규범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

프랑스의 위기가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세종의 무간피차는 다양성을 지우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통합의 지혜를 일깨워 준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