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택한 건 다른 누구도 택하지 않을 거라서였죠. 그리고 당신을 이길 것 같아서요.”
“머리통을 뽑아버릴 건데요?”
지난 23일 찾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 녹음실 안에선 과격한 단어로 한창 한국어 더빙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상 작품은 ‘피지컬:100’ 멕시코판. 화면 속에선 멕시코 출연진들이 모여 힘을 겨루고, 스페인어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머리통’, ‘물어뜯어라’ 등 다소 수위 높은 단어들도 취재진 귀에 들렸다. 녹음이 끝난 후 이재원 오디오 엔지니어의 손을 거치자 더빙 연상이 완성됐다. 실제 출연진의 대사에 맞춰 스페인어가 아닌 한국어 대사가 흘러나왔다.
성우들의 작업이 끝나자 기자에게도 ‘체험’의 기회가 찾아왔다. 화면과 대본엔 대사를 맞춰 말할 수 있도록 시간이 적혀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다음 대결입니다”, “1번 경기장” 등 길지 않은 대사 몇 마디를 가까스로 대사를 읽었더니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화면에 그대로 흘러나왔다. 곧 이 엔지니어가 잠깐의 작업이 이뤄지자 그럴듯한 톤으로 음성이 탈바꿈했다. 겁먹은 약간의 어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날 성우들과 기자가 녹음한 ‘피지컬:100 멕시코’는 한국이 아닌 멕시코에서 만든 넷플릭스 콘텐츠다. 다만 프로그램 분위기가 국내 시청자들에게 낯설진 않았다. 오리지널인 ‘피지컬:100’ 시리즈가 지난 2023년과 2024년 국내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K콘텐츠’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한 한국산 흥행 IP가 세계로 수출되고, 다시 한국 시장을 찾아온 셈이다.
◆K콘텐츠, 세계 어디서든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가 콘텐츠의 국경을 허물고 있다. 이젠 해외 콘텐츠를 한국어로 듣는 게 어색하지 않아졌고, 한국인이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에까지 한국어 더빙이 제공된다.
‘국적’을 초월한 대표적인 콘텐츠가 예능 ‘피지컬:100’ 시리즈다. 한국에서 시작한 ‘피지컬:100’은 출연진들의 신체 능력을 겨루는 단순 명쾌한 포맷을 바탕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국내에서 시즌 1, 2를 터뜨린 데 이어 지난해 아시아편이 방송됐고, 이후 멕시코판과 이탈리아판이 올해 공개됐다.
재밌는 건 콘텐츠가 제공되는 방식이다.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몸’을 중심으로 만든 만큼 언어의 벽만 넘어서면 어느 나라에서든 흥행이 가능하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게 넷플릭스의 현지화(로컬라이제이션) 전략이다. 넷플릭스는 한국 원작에 16개 언어 더빙을 추가했고, 이탈리아판과 멕시코판에는 각각 13개, 10개 언어 더빙을 제작했다. 자막은 시리즈를 합쳐 최대 32개 언어까지 만들어졌다.
물론 K콘텐츠 경쟁력이 높아야 로컬라이제이션도 빛을 발한다. 캐서린 르타트 넷플릭스 글로벌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시니어 디렉터는 지난 15일 열린 글로벌 로컬라이제이션 라운드테이블에참석해 “전 세계 넷플릭스 회원의 80%가 한국 콘텐츠 시청 경험이 있다”며 한국 작품 가운데 최대 규모 번역이 이뤄진 ‘오징어 게임’ 시즌3의 경우 37개 언어 자막, 24개 언어 더빙이 제작됐다고 소개했다.
번역 작업은 오리지널 콘텐츠에 국한되지 않는다. 넷플릭스를 통해 수출되는 라이센스 작품 역시 K콘텐츠 흥행과 함께 번역 규모가 커지고 있다. SBS 플러스와 ENA에서 방영하는 ‘나는 SOLO’ 시리즈는 지난 8월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 스트리밍되고 있는데, 제공되는 자막 언어가 영어∙일본어 등 주요 언어를 넘어선 11개에 달한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솔로지옥’ 등 한국형 ‘연프’(연애 프로그램)가 프랑스 등 국가에서 국제적 인기를 얻은 덕이다.
언어의 수만큼 번역의 질도 중요하다. 그래야 ‘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용어가 유효하다. 외국 콘텐츠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도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K콘텐츠를 찾는 나라가 그만큼 다양해진 만큼 한국어의 ‘맛’을 살리려는 노력도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K콘텐츠의 성공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됐다.
과거 ‘기생충’ 영어 번역을 맡았던 번역가 달시 파켓은 번역계에서 달라진 부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번역할 땐 항상 독자의 관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상대방의 지식을 고려해야 한다”며 “과거엔 소주를 번역할 때 보다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다른 단어를 사용해달라는 요청이 따랐다. 이를테면 알코올(alcohol), 쌀와인(rice wine), 보드카(vodka)와 같은 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문화가 전 세계로 퍼진 덕에 어색한 대체 표현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고 답했다. 파켓은 또 “K콘텐츠 번역에 대한 수요도 확실히 증가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조지아어나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도 시청각 번역 분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방송국에서 글로벌 룰로…달라진 더빙 생태계
넷플릭스의 거대 생태계를 통해 퍼져나간 K콘텐츠 IP는 다시 거대 시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피지컬:100’ 해외판 역시 다시 한국어 자막과 더빙을 거쳐 국내로 수입됐다. K콘텐츠의 로컬라이제이션이 한국 문화를 풀어 설명했다면, 넷플릭스로 한국 더빙 시장 역시 변화하고 있다.
단순 ‘녹음’이 아닌 ‘연기’를 통해 제2의 창작을 추구하는 건 더빙의 ‘기본’이자 오래된 ‘원칙’이다. 다만 자본과 인프라를 앞세운 넷플릭스는 이를 보다 구체화하고, 고도화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이에 대해 “작품의 창작 의도와 문화적 맥락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둔다.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작업을 넘어 캐릭터 감정과 서사를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창작 과정이다. 시청자가 자막에 시선을 뺏기지 않고 화면과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피지컬:100’ 멕시코판 더빙 작업을 진행한 김정령 PD는 “넷플릭스는 더빙 제작진에게 구체적인 쇼 가이드를 함께 제공한다. 리얼리티가 살아야 하는 부분, 비속어가 반드시 나와야 하는 부분까지 짚어준다”고 설명했다. 이 엔지니어는 “음향적으로 중요한 장면은 전 세계 더빙에서 같은 효과가 나도록 구체적인 자료를 공유하기도 한다. 최근 공개됐던 일본의 넷플릭스 시리즈 ‘가스인간’ 때는 인물이 물에 빠지는 장면에서 마이크 위치, 입에 물을 머금는 방식, 바라보는 방향까지 보여주는 녹음 참고 영상이 제공됐다”고 소개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더빙 역시 괴물의 목소리를 만드는 방법을 담은 10분짜리 영상이 전 세계 더빙팀에 제공됐다. 자료엔 음성을 어떻게 복제하고, 층마다 음색을 어떻게 다르게 구성하고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까지 담겨 있었다.
K콘텐츠를 수출할 때 진행한 로컬라이제이션은 역수입될 때도 이뤄진다. 넷플릭스 코리아는 “이탈리아판 더빙에선 ‘본 조르노’, ‘맘마미아’ 등 이탈리아어 원형을 유지해 캐릭터성과 현지 분위기를 전략적으로 살렸다”며 “멕시코판의 경우 스페인어는 영어를 거쳐 한국어로 번역한다. 이 과정에서 원문 뉘앙스가 손실되고 순화되는데, 더빙 버전에선 원문의 구어적∙비속어적 뉘앙스를 다시 살렸다”고 소개했다.
더빙의 룰도 그만큼 더 자유롭게 변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국 중심으로, 어린이 콘텐츠 중심으로 더빙이 이뤄질 때는 표현의 제약도 상대적으로 컸다. 콘텐츠도, 소비층도 다양해진 지금은 더빙 스타일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변하고 있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실제로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 쓰지 않는 표현은 가이드를 통해 가급적 지양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쓰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타이틀 별로 그 가이드도 차이가 크다. 타이틀 성격에 맞게 단어를 선택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김 PD는 “사실 예전엔 쓸 수 있는 표현이 정해져 있어 만드는 입장에선 편했는데, 지금은 자유가 크진 만 만큼 부담도 된다. 원본의 창의성을 많이 살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 녹음에 참가한 박성훈 성우는 “방송국에 있을 때에도 영국 드라마 등을 더빙한 경험은 있지만, 스페인어 더빙에 참가할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넷플릭스와 일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접해보고 있다”며 “해외에선 일부러 한국어 더빙을 소비하는 시청자도 있다고 들었다. 한국어 공부를 위해 보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역시 더빙을 맡은 최우성 성우는 넷플릭스가 합류한 더빙 생태계에 대해 “신인에게도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고 느낀다. 비슷한 기수의 동료들과 지금이 좋은 시기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며 “더빙 환경이 과거보다 줄었다는 우려도 들었지만, 새로운 작업이 계속 생기고 넷플릭스처럼 기회를 주는 곳도 있다. 제가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현재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