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었다. 로돌포는 연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두려웠다. 버림받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미미는 다가오는 죽음을 깨닫고 스스로 이별을 택했다. 서울시오페라단 오페라 ‘라보엠’에서 연인으로 만나는 테너 이원종과 소프라노 박혜상이 읽어낸 두 사람의 속내다.
지난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두 성악가에게 이번 공연은 각별하다. 박혜상에게는 오래 품어온 미미를 처음 만나는 무대다. 이원종에게는 데뷔 배역인 로돌포로 긴 슬럼프를 지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다.
푸치니 ‘라보엠’은 19세기 파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과 상실을 그린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랑에 빠진 시인 로돌포와 자수를 놓는 미미를 갈라놓는 건 가난과 병이다. 3막에서 로돌포는 친구에게 미미와 더는 만나지 못하겠다고 모질게 말하다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원종은 먼저 잔인하게 보여야 뒤이어 드러나는 진심이 살아난다고 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요. 아무리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줘도 꽃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거죠. 장작을 댈 능력도 없어서 난로는 꺼져 있고 집은 황량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숨어서 그 말을 듣는 미미는 애써 외면하던 현실과 마주한다. 박혜상은 이별을 결정하는 주체가 미미라고 봤다.
“미미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로돌포가 자신의 병세를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내가 정말 아프구나. 정말 죽는구나’ 하고 현실이 확 다가오는 거예요. 그때 ‘너를 떠날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정에 빠져도 노래하는 순간에는 냉정해야 한다. 박혜상은 “오열하거나 뱉어내야 하는 소리가 있지만 막 질러서는 안 된다”며 “감정과 음악 사이 균형을 맞추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박혜상은 2020년 아시아 소프라노 최초로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해왔지만 미미를 맡는 건 처음이다. 지휘자들에게 젊은 시절 명가수 미렐라 프레니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라며 권유받았지만 선뜻 도전하지 못했다. “늘 자신이 없고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미미가 큰 도전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조심했던 것 같아요. 돌고 돌아 왔지만 지금은 맞는 옷을 입는 느낌이에요.” 그는 다른 역할로 영역을 넓힌 뒤에도 미미로 돌아와 자신의 목소리와 음악을 점검하고 싶다며 “50세가 넘어서도 돌아올 수 있는 역할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2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오페라하우스에서 로돌포로 데뷔한 이원종은 코로나19 무렵부터 수년간 슬럼프를 겪었다. 독일 극장 전속 생활을 마무리하고 프리랜서로 전환할 준비를 하는 그에게 이번 공연은 재출발의 무대다. 그래서 첫 연습을 마친 뒤 이원종은 박혜상에게 “미안해요.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아요”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습니다. 욕심이 납니다. 잘하고 싶습니다.” 박혜상은 그 말을 듣고 그가 원하는 로돌포에 더 귀 기울이게 됐다고 했다.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라보엠’은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이원종은 자신이 몸담은 곳을 비롯한 유럽 극장들이 재정난을 겪고 있지만 그날 공연에는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게 저희에게는 희망이에요. 관객도 돈을 내고 그 희망을 사러 오는 거잖아요. ‘우리도 이래요. 그래도 무대 위를 보세요’ 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박혜상도 어려움을 예술로 풀어내는 사람들에게서 작품 속 청춘들을 떠올렸다. “관객도 그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아주 찰나 같은 삶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서 공연을 찾는 것 같아요. 저희는 저희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11월 5∼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