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 남부에서 발생한 고속열차 추돌 사고는 컴퓨터 장애와 사람의 판단 오류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열차 참사가 난 것은 근본적으로 부실한 시설관리와 방만한 운용 때문이라는 비판이 커지면서 내달 총선을 앞둔 산체스 정권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28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쯤 발생한 열차 사고 피해는 사망 68명, 부상 100여명으로 늘었다. 사고 초기 64명이던 것이 구조활동이 진행되며 늘어난 것이다. 주스페인 한국대사관은 기차에 한국인 10명도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중 2명이 다쳐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전했다.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를 잇는 고속철로 하행선에서 국영 철도회사 렌페 AVE 기차가 민영 이리오 기차의 후미를 들이받은 이번 사고는 자동 제어 시스템의 기술적 결함으로 인해 사고 지점을 포함한 69㎞ 구간의 모든 열차 운행이 중단된 상태에서 발생했다. 문제를 일으킨 시스템이 복구되지 않은 채 렌페 기차가 운행을 재개했고, 시속 200㎞가 넘는 속도로 25㎞를 주행하다가 멈춰 있던 이리오 기차와 충돌했다. 오스카르 푸엔테 교통장관은 렌페 기차의 운행 재개 결정에 대해 “관제센터의 몫”이라며 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고 현장을 찾은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오늘 스페인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며 29일부터 사흘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사고는 2013년 스페인 북서부 도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인근에서 80명이 숨진 고속열차 참사를 뛰어넘는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열차 사고로 기록되게 됐다. 특히, 올해 1월 스페인 안달루시아주 코르도바도 아다무스 인근에서 두 대의 고속열차가 충돌해 46명이 숨지고 150명 이상 다치는 유사한 사고가 있었던 터라 충격이 더 크다.
올해 두 번의 사고가 같은 노선, 동일한 철도 운영사가 관여돼 있다는 점에서 안전 관리 부실 등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이 구간이 스페인 고속철도 중 가장 노후화된 노선인 만큼 유지보수에 충분한 예산이 투입됐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로이터가 유럽연합(EU)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스페인이 고속철도망에 투입하는 예산은 연평균 약 15억유로(약 2조2400억원)로 최고 수준이지만 자금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쏠려 있다. 정작 기존 시설의 유지보수에 투입되는 예산 비중은 16% 수준에 그쳐 독일 등 여타 유럽 국가에 비해 크게 뒤처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스페인 철도 노조는 사고 전에 철도 안전 대책 이행을 요구하며 29일 하루 고속철 운행을 멈추는 파업을 예고했는데, 파업 돌입 하루 전 사고가 발생했다. 시민들은 이날 마드리드의 교통부 청사 앞에서 열차 충돌 사고에 대한 책임 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번 사고는 다음달 총선을 앞둔 산체스 총리와 스페인 사회노동당(POSE) 연립정부에게 초대형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좌파 성향 산체스 총리는 아내와 측근의 연속된 비리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지난달 87세 여성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의 강제 퇴거 사건으로 주거 안정을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가 발생하자 조기 총선을 선언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바 있다.
그러나, 산체스 총리의 의도와 달리 사회노동당은 민간 여론조사 대다수에서 보수 성향의 제1야당 국민당(PP)에 열세를 보이며 오히려 정권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주요 정당은 국가 애도 기간을 맞아 선거 운동을 중단했으나 야권은 이번 참사 관리책임을 정부에 물으면서 산체스 총리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