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극 ‘에너미’의 대단원은 워터파크 리조트 개장식이다. 화려한 조명과 EDM 속에 유튜버가 등장해 쇼를 펼친다. 가설 비계 사이에 달린 대형 화면은 라이브 중계창으로 변모한다. 조명이 객석을 환히 비추고 무대는 행사장 단상이 된다. 배우들은 극장 뒤편에서 나타나 개장식에 참석하듯 객석 맨 앞줄에 앉는다. 관객 또한 행사에 참석한 시민이자 민중이 된다. 지역의 미래를 약속하고 번영을 자신하는 시장의 축사가 한창인 행사장에 여자와 딸이 나타난다. 여자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반전을 기대하게 된다. 감춰진 진실이 마침내 축제의 소음을 뚫고 나올 차례다.
그러나 공격은 뜻밖의 방향으로 향한다. 커스틴은 관객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자신에게 쏟아진 사이버 폭력에서 출발한 분노는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단죄하는 대중 전체로 번진다. 무대 위 사건을 지켜보던 관객은 어느새 심판받는 자리에 앉아 있다. 한 사람을 ‘민중의 적’으로 몰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던 연극은 이제 대중이 스스로를 해치는 적이라고 몰아붙인다.
서울시극단 신작 ‘에너미’는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을 소셜미디어 시대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산업이 쇠퇴하고 인구가 빠져나가는 스코틀랜드 소도시에서 대규모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다. 누구는 일자리를 기다리고 누구는 공모주에 돈을 넣는다. 개장 직전 리조트 이사 커스틴이 수돗물 오염을 확인하면서 균열이 생긴다. 오염원은 하필 시아버지 데릭이 소유한 폐기물 처리장으로 추정된다. 시장인 언니 보니는 지역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며 공개를 막는다.
진실을 알려야 한다며 폭로를 부추기던 기자는 시장의 협박에 돌아선다. 망설이던 커스틴이 직접 소셜미디어에 오염 사실을 알리자 비난이 쏟아지고 공격은 딸에게까지 번진다. 기자는 오랜 친구만이 알 수 있는 과거지사를 들추며 공격에 땔감을 보탠다. 주민을 지키려던 사람이 주민들의 적이 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1882년 발표된 원작은 온천도시의 수질 오염을 발견한 의사 토마스 스토크만이 시장인 형과 언론 그리고 주민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가로막히는 이야기다.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는 형제를 자매로 바꾸고 온천을 대형 리조트로 옮겼다. 신문과 시민집회를 중심으로 형성되던 여론은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방송으로 이동했다. 2021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초연했으며 이번 공연은 강훈구가 번역·윤색하고 이준우가 연출했다.
‘에너미’가 오늘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붙잡은 것은 개인을 집어삼키는 온라인 여론의 속도와 압박이다. 고정형 카메라 한 대와 이동형 핸디캠은 현장과 중계화면을 동시에 보게 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화면 속 사건으로 바뀌고 거기에 댓글과 비난이 달라붙는다. 1만여개에 달하는 댓글이 비계 사이 화면을 끊임없이 채운다. 짧은 단죄가 서로에게 동조하며 쌓이고 그 앞에서 개인은 왜소해진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쓴 글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거대한 폭력이 되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여론이 만들어지는 실체가 보는 이 마음을 날카롭게 찌른다. 스튜디오 힝의 영상과 박상봉의 무대가 맞물리는 이 대목에서 공연은 가장 큰 힘을 얻는다.
그러나 객석을 향한 커스틴의 항변이 거세질수록 그 힘이 향하는 방향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은 공론의 장에 올라 다수를 공격한다. 시민집회에서 온천 문제에 관한 발언마저 막히자 스토크만은 진실을 억압하는 다수의 횡포를 비판한다. 나아가 무지한 다수보다 앞선 소수가 옳다는 엘리트주의까지 드러낸다. 시민들은 그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한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타인을 경멸하는 오만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 관객은 그의 용기를 지지하면서도 오만에는 거리를 둘 수 있다.
‘에너미’에서는 그 거리가 사라지다시피한다. 환히 드러난 객석을 향해 주인공의 분노가 쏟아진다. 오염을 은폐하거나 진실을 외면한 정치권력·언론·기업의 책임을 추적하던 극은 대중 일반을 향한 포괄적인 분노로 흩어진다. 이익을 내밀면 기꺼이 넘어가는 대중을 질타할수록 정작 그 이익으로 사람들을 움직인 쪽의 책임은 흐려진다. 문소리와 이봉련이 나눠맡는 커스틴의 열연은 분노를 선명하게 전달하지만 잘 달리던 열차가 궤도를 이탈한 느낌이다.
특종을 만들어야 한다며 커스틴을 재촉하다 권력 앞에 돌아선 기자나 재산과 이름값을 지키기 위해 며느리를 희생양 삼으려는 시아버지는 익숙한 모습이다. 원작의 인쇄업자를 대신해 여론의 길목에 선 유튜버도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놓고 마지막에 대중 전체의 책임을 묻는다.
누구나 순식간에 유명해지거나 욕을 먹거나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 소셜미디어의 폐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익숙한 문제지만 ‘에너미’의 댓글 화면과 실시간 중계는 이를 무대에서 새롭게 체감하게 한다. 하지만 그 끝이 대중은 잔인하고 누군가를 단죄하기 좋아한다는 질타라면 너무 익숙한 종착점이다. 화면이 보여준 현실은 날카로웠지만 욕망이 모인 개장식 단상에서 쏟아진 연설은 그만큼 나아가지 못했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11월 14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