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정은 2021년 초 유튜브에서 30만원짜리 비트(반주)를 하나 샀다.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붙여 녹음실에 갔고, 그해 5월 첫 싱글 ‘잠수정’이 나왔다. 음악을 배운 적은 없었다. 두 번째 곡은 무료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방에서 ‘킥’과 ‘스네어’를 하나씩 눌러 보며 만들었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브랜드 ‘227’을 운영하며 그림책 두 권을 쓰고 그린 그는 케이팝(K-POP) 굿즈 매장 직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곡을 낸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을 떠나 본 적 없는 이 30대 창작자는 스스로를 “아티스트 배수정”이라고 소개했다.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다. 지난 8월24일 부산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비트 하나 사서 만든 ‘잠수정’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나.
“부산에서 태어나 평생 살고 있는 배수정이다. 어떤 자리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소개가 달라진다.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 파는 브랜드 ‘227’을 운영하니 ‘배 사장’이나 대표로 불리기도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직원이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다양한 형태의 배수정으로 살아간다. 여러 가지 내 일을 하다 보면 불안하니까 고정 수입이 있었으면 해서 일을 병행한다. 최근까지 3년 넘게 사진 찍는 곳에서 일했고, 지금은 케이팝 아티스트 굿즈를 파는 매장에서 일한다.”
―어떤 음악을 듣고 자랐나.
“어려서부터 만들고 그리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는 학교 마치면 오락실 안에 있는 노래방에 갔다. 크면서 내 시대에 인기 있던 게 2NE1처럼 YG에서 나온 힙합 기반 음악이었다. 멋있다고 생각해 많이 따라 불렀다. 그다음 유행이 ‘쇼미더머니’였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직접 가사를 쓰고 표현하는 게 되게 멋있어 보였다. 가수는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서 쉽게 도전하지 못했는데, 일반인들이 도전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유튜브에 ‘지코 타입 비트’ 같은 게 유행할 때 거기에 가사를 써 보기 시작하면서 나만의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2021년 첫 싱글 ‘잠수정’은 어떻게 나왔나.
“음악을 배운 적이 없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재밌다는 생각이 컸다. 비트를 만들 줄 모르니까 유튜브를 찾아보니 저작권을 풀어서 비트를 파는 사람들이 있더라. 사서 멜로디를 짜고 발매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제일 저렴한, 다른 사람도 쓸 수 있는 비트를 30만원에 샀다. 내가 상상하는 걸 가사로 쓰고 멜로디를 짜서 녹음실에 가서 녹음했다. 2021년 초에 비트를 사서 5월에 발매했다. 힘들거나 어렵다기보다 재밌었다.”
―두 번째 곡 ‘초콜릿 케이크 요리법’은 직접 비트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잠수정’을 내고 나니 비트가 내 것이 아니라서 100% 내가 생각하는 걸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비트도 만들어 봐야겠다 싶어 검색했더니 무료 프로그램이 있더라. 작곡 프로그램 ‘케이크워크’를 내려받아 방에서 킥(큰북), 스네어(작은북), 하이햇(심벌)을 눌러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건 이런 느낌이지’ 하며 하나씩 만져 봤다. 앉은자리에서 비트를 만들고 가사를 썼다. 하다 보니 재밌고 계속하고 싶어졌다.”
◆부산음악창작소, 그리고 빅싼초
―부산음악창작소 지원을 받아 ‘BLUE DIVE’를 냈다.
“혼자 작업하다 부산시 지원이 있는지 찾아보다가 창작소를 알게 됐다. 마침 싱글 음반 발매 지원사업 신청 기간이었고 나는 두세 곡을 낸 상태였다. 지원받으면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서류가 통과됐고, 가서 실기 오디션을 봤다. 일렉기타를 치면서 코드 쿤스트의 ‘O’를 불렀다. 최종 3명에 뽑혔다. 유명 프로듀서 세 분을 초빙해 기회의 장을 마련해 준 거였다. 나는 큐브엔터테인먼트에서 (여자)아이들을 프로듀싱한 빅싼초와 작업했다. 부산에서 그렇게 활발히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몰랐던 걸 많이 알게 됐고 깨달음도 컸다. 2022년에 작업해 2023년 1월에 나왔다.”
―프로듀서 빅싼초는 뭐라고 했나.
“목소리와 랩할 때의 발음이 좋다고 해 줬다. ‘BLUE DIVE’는 내가 미리 이런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고 단편처럼 상황에 대한 스토리를 써서 제안했는데, 아이디어 면에서도 가진 게 많다고 해 줬다.” (프로듀서 빅싼초는 9월2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배수정에 대해 “오디션 때 목소리와 음악이 좋았다. 목소리가 독특했고, 스토리텔링이 독창적이었다. 다음 음악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뒤로는 교류가 없었나.
“부족하다고 느껴서 비트 만드는 레슨을 받았다. 다른 분에게 주 1회, 두 달 동안 작곡 프로그램 ‘에이블톤’ 쓰는 법을 배웠다. 엄청난 걸 배운 건 아니지만 비트를 만들 때 어떻게 설정하는지를 알게 됐다. 그다음 작업인 ‘눈벚꽃’과 ‘박스 아웃’은 에이블톤으로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아티스트가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재량껏 쓰는 방식의 지원사업이 있어서 빅싼초에게 연락해 데모를 보내고 기획안을 만들어 냈는데 그건 선정이 안 됐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평범한 인문계 학생이었다. 고3 때 공부를 엄청 잘하진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갈까 하다가, 그래도 잘하는 게 만들기와 그림이니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당시엔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며 살아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당장 제일 잘할 수 있는 걸로 간 거다. 그런데 입시 때 시간 안에 그림을 그려야 하는 압박을 겪으면서 그림과 멀어졌다. 대학에서는 공연 동아리를 했다. 기타도 치고 노래도 했다. 힙합, 알앤비.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많이 느꼈다. 삶 속에 음악이 항상 있었다.”
◆“틀에 가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래퍼 대부분이 예명을 쓰는데 본명 그대로다.
“세상에 내보내는 건 내 상상과 생각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랩이든 노래든 그림이든 중심에 내가 있다. 예명이나 또 다른 나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흔한 이름이지만 그대로 쓴다.”
―음원 사이트 분류도 곡마다 랩/힙합, 인디, 발라드로 제각각이다. 본인 음악을 뭐라고 부르고 싶나.
“틀 안에 가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장르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개성을 담아 표현하는 게 먼저다. ‘배수정스러운 음악이네’ 하고 받아 줬으면 좋겠다.”
―‘잠수정’ ‘BLUE DIVE’ 등 바다와 물속이 계속 등장한다. 쓴 단편소설도 파도로 시작한다.
“부산에서만 평생 살았으니 바다가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이다. 가까이 있고 언제든 볼 수 있고, 편안함과 평안함을 준다. 파도나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름이 자연스럽게 기반이 됐다.”
―가사를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내 말투로 표현하자는 게 가장 크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 어릴 땐 뭘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크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생기는 게 좋고 소중하다. 벅찬 감정을 느꼈을 때 메모해 둔다. 돈이나 부처럼 랩에서 많이 다루는 주제는 나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답게 해 나가고 싶다.”
―화성학을 모르고도 음악을 만들 수 있나.
“초등학생 때 피아노를 조금 배웠고 대학 때 기타를 배운 게 전부다. 키보드를 눌러 보고 좋아하는 소리들을 쌓아 나갈 때 그게 화성학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좋다고, 예쁘다고 느껴지면 쓸 뿐이다. 전문가가 보기엔 단순하고 ‘이렇게 만들어도 되나’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틀을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개성이 생기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책 「나는 지구에 납작 엎드려 있어」 를 쓰고 그렸다. 어떤 이야기가 노래가 되고 어떤 이야기가 글이 되나.
“음악은 시처럼, 글은 더 긴 호흡으로 간다. 단순한 상황이나 이미지는 음악이 되고, 긴 글이 음악이 되기도 그림이 되기도 한다. 다 연결돼 있다.”
◆쇼미더머니 예선, 새벽 1시
―부산에서 혼자 음악을 한다는 것의 어려움은.
“서울에는 유명한 사람도 많고 기회도 열려 있는데, 부산에서는 혼자 작업하고 혼자 하는 데 익숙해졌다. 디자인을 못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나는 혼자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그 점은 다행이었다. 대신 돈 버는 일을 계속 병행해야 하니 작업은 자기 전에 조금씩 한다. 여유롭게 사람을 만나면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쇼미더머니 부산 예선에도 나갔다.
“두 번 나갔다. ‘BLUE DIVE’ 때는 코로나 시절이라 마스크를 쓰고 봤고 래퍼 저스디스가 심사했다. 지난해 시즌12 예선에서는 가수 크러시가 심사했는데 탈락했다. 아침에 접수를 받고 내 차례는 새벽 1시쯤이었다. 대기가 길었지만 끝까지 다 들어 줬다. 내 걸 해 볼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 부산에도 사람이 많고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포기하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이어졌으면 좋겠다.”
―서울로 가야 하나 고민한 적은.
“해 본 적 없다. 목적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다를 거다. 부산에 살아서 창작소에 지원할 수 있었다. 부산 거주나 직장이 증빙되는 사람만 지원할 수 있으니 서울이었다면 원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을 거다. 서울은 사람들이 바쁘고 열정적으로 사는 곳이라 그 속에서 오히려 방황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부산은 좀 더 여유가 있고, 하고 싶은 걸 지속할 수 있게 숨 쉬게 해 주는 곳이다.”
―무대에 선 적은 있나.
“곡을 만든 다음에 공연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지역 행사보다는 음악이 어느 정도 쌓였을 때 좋아해 주는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음악과 글, 그림을 함께 보여 주는 전시회 형태로 해 보고 싶다. 지역 공연 지원을 통해 그런 순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가족의 반응은.
“평범한 가족이다. ‘네가 이런 걸 했느냐’ 하는 반응이었다. 서른이 넘었고 안정적인 직장도 아니니 부모님이 싫어하실 수도 있는데, 끊임없이 일하면서 창작을 병행하니 신뢰해 주신다. 노래를 들어 주고 홍보도 해 주신다.”
◆“어둠에서 나를 구해줬다”는 메시지
―기억에 남는 팬이 있나.
“유럽에 사는 외국인에게 인스타그램 DM을 받은 적이 있다. 자기가 극도로 나쁜 감정에 빠질 때마다 반복해서 듣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내 노래가 어둠에서 자기를 구해 줬다고 했다. 그 메시지를 받고 엄청 울었다.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감사했다. 직접 연락하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좋은 것들을 만들게 된다.”
―책에 스스로를 ‘소리 없는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라고 썼다. 배수정에게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
“가만히 있으면 흔적이 없으니까 소리 없는 발자국이라도 남기고 싶은 거다. 대단한 성공을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오늘 하루에도 작은 성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자극적이고 큰 성공에 몰두하기보다 일상 속에서 작은 성공을 맛봤으면 좋겠다.”
―앞으로 부산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고 싶나.
“부산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힘들 때 멍하니 보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했다. 다양한 추억이 부산이라는 공간 안에 녹아 있다. 부산에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쌓아 온 기반도 부산스럽다고 생각한다. 서울스러운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부산스러운 것들을, 부산처럼 여유롭고 자유롭게 표출하고 싶다. 자유롭게 창작을 이어 가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이런 창작자도 있다는 걸 담아 달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