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훈 기자] 2016~2017시즌부터 2025~2026시즌까지 10시즌 연속 1위(6회), 아니면 2위만 할 정도로 2010년대 중반부터 2020년대 중반까지 V리그 남자부를 지배하고 있는 대한항공. 2020~2021시즌부터 2023~2024시즌까지는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통합우승 4연패를 일궈내며 ‘대한항공 왕조’를 개창했다. 이는 V리그 남녀부 통틀어 최강 왕조로 꼽히는 ‘삼성화재 왕조’(2007~2008시즌-2013~2014시즈까지 챔프전 7연패)조차 해내지 못한 대위업이었다.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대한항공도 V리그 출범 초창기만 해도 3인자, 4인자를 왔다갔다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V리그의 전신인 슈퍼리그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던 프로배구 초창기의 남자부는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 양강의 싸움으로 전개됐다. 대한항공은 LG화재·LIG손해보험(KB손해보험의 전신)과 3,4위를 다투던, 시쳇말로 ‘쩌리’ 시절이었다.
그랬던 대한항공은 2010~2011시즌에 처음으로 V리그 남자부 정규리그 패권을 가져왔다. 프로 4년차에 접어든 한선수의 조율 아래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 토종 에이스 김학민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지만, 그 시즌은 ‘이 선수’의 데뷔 시즌이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4순위로 대한항공의 유니폼을 입자마자 팀의 왼쪽 날개 한축을 든든히 책임져줬던 그 덕분에 대한항공은 비로소 강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남자’, ‘헌신의 아이콘’ 곽승석(38) 이야기다.
곽승석은 데뷔 시즌에 리시브 효율 60.31%를 기록했다. 곽승석이 리시브를 든든히 받쳐준 덕분에 대한항공의 시스템이 잘 돌아갔다. 대한항공은 프로 초창기 시절, 신영수(현 대한항공 코치), 김학민(현 IBK기업은행 코치), 강동진 등 공격에 치우친 아웃사이드 히터들이 많았는데, 수비력에 방점이 찍히는 살림꾼 유형의 곽승석의 입단 이후 밸런스가 잡혔고, 그제서야 삼성화재-현대캐피탈의 ‘양강’ 체제에 균열을 냈다.(그 시즌 챔프전에 직행했으나 챔프전은 삼성화재에게 4전 4패로 물러났다)
곽승석이 받고, 한선수가 올리는 대한항공의 기본 토대는 고교 얼리로 2013~2014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해 2라운드 6순위로 프로에 데뷔한 정지석이 기량이 만개하면서 시스템이 완성됐다. 대학을 거치지 않고 프로로 직행한 정지석이 천천히 기량을 닦는 동안 곽승석은 변함없이 팀 시스템의 중심으로 버텨냈다.
한선수-정지석-곽승석으로 이어지는 대한항공의 토대가 굳건히 완성된 2017~2018시즌, 대한항공은 드디어 V리그 챔프전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세 선수는 2025~2026시즌까지 챔프전 우승 6회, 통합우승 5회 등 구단의 빛나는 역사를 함께 이뤄냈다.
다만 스포트라이트는 세터인 한선수와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방점을 찍어준 정지석에게 집중됐다. 한선수가 정규리그 MVP 2회(2022~2023, 2025~2026), 챔프전 MVP 2회(2017~2018, 2022~2023), 정지석이 정규리그 MVP 2회(2018~2019, 2020~2021), 챔프전 MVP 3회(2020~2021, 2023~2024, 2025~2026)를 차지한 반면 곽승석에게는 정규리그나 MVP 트로피가 없다.
그럴 수밖에. 곽승석의 진가는 기록지에서 모두 쓰여지지 않는다. 코트 후방에서 리시브를 받고, 상대 공격을 걷어내는 게 주 역할이다 보니. 그러나 배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안다. 대한항공 왕조가 개창할 수 있었던 것은 곽승석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통산 기록만 봐도 곽승석의 희생과 헌신이 느껴진다. 통산 486경기에 출전해 3473점을 올렸다. 경기당 10점이 되지 않는다. 공격 시도는 5843번이었고, 2839개를 성공해 48.59%를 기록했다. 공격보다 리시브가 더 많았다. 16시즌 동안 무려 1만884개를 받아 5955개를 정확히 세터 머리로 전달했다. 경기당으로 치면 매경기 22.4개를 받아야 했다. 통산 리시브 효율은 50.965%. 공격 성공률보다 더 높기 힘든 리시브 효율을 이뤄낸 남자가 여기에 있었다. 리시브 정확 통산 2위, 디그 역대 7위(2884개), 수비 성공 역대 2위(8839개). 리베로보다 수비를 더 잘하는 공격수가 바로 곽승석이었다.
2026~2027시즌 개막전이 열린 31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선수 곽승석’의 성대한 은퇴식이 열렸다. 곽승석은 지난 7월 이미 개인 SNS로 현역 은퇴를 알린 바 있다. 대한항공은 데뷔와 동시에 팀 체질을 바꿔내며 팀 역사의 물꼬는 바꾼 곽승석을 위해 헌정 영상과 우승 반지, 동료들의 사인이 담긴 유니폼 액자, 핸드 프린팅 등을 선물했다. 그리고 곽승석의 등번호 9번을 구단 역사상 최초로 영구결번 처리했다. 그렇게 곽승석의 마지막을 예우했다.
조용하지만 뜨거웠고, 담백했던 그의 플레이답게 곽승석은 은퇴식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팬들은 더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행사를 마치고 마이크를 잡은 곽승석은 “대한항공의 마지막 9번 곽승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2010년부터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어 기분 좋다. 팬들게 감사드린다. 비록 저는 이제 코트에 없지만, 어디서든 영원한 대한항공의 넘버나인으로 남겠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데, 뭘 할 지는 모르겠지만 팬분들의 기운을 절대 잊지 않고, 그 힘으로 더 멋진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인사를 전했다.
곽승석과 대한항공의 왼쪽 측면을 든든히 지켜온 정지석은 개인 SNS를 통해 “나는 우리가 역대 최고의 OH 듀오였다고 생각하고, 내 전성기는 형이랑 함께 했을 때였고, 형이 나를 최고로 만들어줬고 내꿈을 이뤄졌어요.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최고로 만들 차례...영원한 내 롤모델이자 라이벌, 그 동안 고생 너무 많이 했어요. 항상 응원할게요. FOREVER NO.9”이라고 샤라웃했다.
이제는 대한항공의 영원한 ‘넘버나인’ 곽승석이 은퇴하니 문득 이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넘버나인, 넘버나인, 넘버나인, 나를 떠나지 말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