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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궤적 좇아… ‘무명의 원석’ 캐내다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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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실린더’ 노두용 대표의 뚝심

2020년 봉천동 작은 공간서 시작해
3년 만에 프리즈 등 세계 무대 안착

졸업 전 신진 발굴 ‘토크’ 기획·운영
아직 검증 안 된 작가에 과감히 투자

미술계 기성체제 틀 깬 시도로 눈길
작가와 갤러리 ‘동반성장’ 내실 다져

수많은 갤러리가 공존하는 오늘날, 갤러리는 단순한 전시 공간이나 작품 판매의 현장을 넘어 자신이 선택한 작가와 미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선언문이다. 2020년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출발한 노두용 대표의 실린더(CYLINDER)는 기성 미술계가 정립해 놓은 전형적인 갤러리의 루트를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궤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실린더1로 불리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자그마한 공간에서 출발해 불과 3년 만에 프리즈와 같은 세계적인 아트페어 무대에 안착하고 두 번째 공간 실린더2를 용산에 개관하는 등, 실린더가 보여준 행보는 단순한 운의 결과라기보다 날카로운 안목과 치밀한 기획이 축적된 결과로 읽힌다.

 

◆작가의 시선에서 갤러리스트의 문법으로

실린더는 노 대표 본인의 개인 작업실이자 동료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소소한 공간으로 처음 구상되었다. 운영을 시작하며 작가로서의 자아는 일찌감치 비워냈지만, 그는 2020년 수개월에 걸친 공간 보수 과정을 거치며 작가 지망생으로서 가졌던 마지막 시선이 공간에 깊이 반영되었다고 회고한다. 가령 작품 감상의 몰입을 방해하는 대형 문손잡이를 철거하고 손잡이 없는 통유리 문으로 문을 교체한 시도가 대표적이다. 작품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보여주기 위해 내부 환경을 완벽하게 새것처럼 유지하고 시선을 건드는 것들이 있다면 과감히 수정해 버리는 행위는, 단순한 보수작업을 넘어 오늘날 실린더를 지탱하는 시각적 문법이자 상징으로 작동한다.

‘리스테 아트 페어 바젤 2026’ 전시 전경.
‘리스테 아트 페어 바젤 2026’ 전시 전경.

작가로서의 경험은 공간의 형태를 넘어 운영 프로그램에도 반영된다. 실린더는 매년 국내 미술대학 졸업 전시에서 신진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는 ‘토크(TORQUE)’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학부 졸업 후 작업이 처분되거나 잊혀지며 느꼈던 무력감을 몸소 경험했던 노 대표는, 아카데미와 프로의 영역을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자처하며 작가들에게 ‘최소한 한 번의 전시 기회’를 더 제공하고자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일은 가능성에 투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갤러리 입장에서는 상당한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또한 졸업 전시에서 발굴한 작가와 함께 간다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토크 프로그램을 갤러리 프로그램의 최전선에 위치시키며 갤러리 고유의 정체성 중 하나로 각인시켜 왔다.

◆불확실성 속에서 벼려낸 고유한 지문

갤러리스트로서 노 대표가 작가를 선택하는 방식은 지극히 직관적이다. “여름에 달리기를 하다가 흘러가는 멋진 풍경을 보면 기억에 담고 싶고, 목이 마르면 자연스레 시원한 물을 찾게 되는 것처럼” 그는 선택의 기준을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본능적 감각에 빗대어 말한다. 정교한 설명보다는 이미지를 마주한 순간 느껴지는 질문들, 작품을 만든 창작자와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궁금증이 선택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졸업 전시를 주목하는 것도 시작점에 서 있는 신진 작가의 작업에서 순수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린더가 소개하는 작가들을 보면 이처럼 시장에서 아직 미학적·상업적으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작가들이 많다. 상업 갤러리 입장에서 이는 적지 않은 재정적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그러나 노 대표는 갤러리 프로그램은 ‘지문과 같은 고유한 것’이라며, “이를 꾸려가는 사람의 결이 묻어나는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그것을 점점 강화시키는 것이 유효한 갤러리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힌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기존의 문법 안에서 경쟁하지 않고 ‘아웃복싱’하는 행위로 표현한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로부터 가능성을 발견하고 상업적 안정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업을 소개하는 일은 그가 말하는 기성 체제의 바깥에서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는 시도다.

◆확률을 뚫고 세계 무대로

“(입자의 세계에서는) 자연법칙에 의해 완전히 막히지 않은 현상이라면,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자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의 양자역학 명제를 삶의 모토로 삼는 노 대표에게, 미시세계의 확률적 가능성은 갤러리의 운영 철학과 닿아 있다. 금지되지 않은 목표라면 지속적인 시도를 통해 필연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SNS를 통해 선언한 주요 글로벌 아트페어 진입을 놀라운 속도로 현실화했다. (실제로 실린더는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 첫해 ‘포커스 아시아 스탠드 프라이즈’를 수상하며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노 대표는 스스로에 대해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본인이 세운 장기적 목표를 계속해서 이루고 싶어 하며, 이를 위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긴 호흡으로 나아가는 태도는 작가와의 인연에서도 드러난다. 2021년 1월, 갤러리 개관 초기 노 대표가 정성 어린 장문의 편지로 전시를 제안한 이유성 작가는 봉천동 실린더1의 기획전 ‘Crystal Scratch’를 시작으로, 2023년 용산(실린더2)의 개관전 ‘Yolk’, 그리고 바젤에서 열린 리스테 아트 페어를 거쳐, 올해 프리즈 런던 ‘Artist to Artist’ 섹션에 이르기까지 실린더라는 갤러리 역사의 굵직한 궤적을 함께해 왔다.

지난달 실린더는 김아영 작가의 초대로 프리즈 런던에서 이유성의 신체 알루미늄 캐스팅 신작 시리즈를 선보였다. 봉천동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된 인연이 용산의 개관전과 해외 주요 아트페어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작가와 갤러리가 지속적인 협업을 통해 다음 단계를 함께 모색하며 성장해 온 모범 사례이자 갤러리의 내실을 장기적 관점에서 단단히 일궈 나가는 노 대표의 운영 철학을 보여준다.

◆낮은 무게중심을 유지하며

1인 갤러리로 시작하여 규모가 커진 현재까지도 여전히 강도 높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노 대표에게 ‘그래서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묻자, 그는 “전시가 끝나고 작가로부터 그 자체로 즐겁고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고 밝혔다. 사소한 고백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시간의 보상을 얻는다는 대답은 그가 갤러리 운영의 성과를 판매나 외형적 성장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을 시작하며 가졌던 ‘미술계 안에서 유의미한 이정표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붙잡은 채, 그는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낮은 무게중심을 유지하며 가보지 못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중이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