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 이창호(51) 9단이 세계 바둑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프로 입단 40년 2개월 만에 개인 통산 2000승을 달성하며 세계 최초로 프로 통산 2000승 고지를 밟았다. 그가 꼽은 대기록의 원동력은 특별한 비결이나 거창한 목표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바둑을 묵묵히 이어온 시간, 그리고 지루할 만큼 반복한 일상이었다.
한국기원은 3일 서울 성동구 마장로 사옥에서 이창호 9단의 통산 2000승 달성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과 조한승 프로기사협회장, 홍민표 국가대표 감독을 비롯한 바둑계 인사와 후배 기사들이 참석해 대기록을 축하했다.
이창호는 지난달 26일 전북 완주에서 열린 2026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 11라운드에서 최명훈 9단을 상대로 207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1986년 8월 만 11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한 이후 40년 2개월 만에 이룬 성과다. 통산 전적은 2000승 1무 830패, 승률은 70.67%에 달한다.
이날 기념식에서 이창호는 “많은 분이 축하해 주셔서 감사하다. 열심히 바둑을 두다 보니 이렇게 뜻깊은 기록까지 만들게 돼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0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담담하게 답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바둑만 했기 때문에 단조롭게 살아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2000승은 뜻깊고, 어떻게 보면 나 자신에게 주는 상처럼 느껴진다.”
이창호는 한국 바둑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다. 1989년 KBS바둑왕전에서 국내 기전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고,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세계대회 최연소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5년 춘란배까지 메이저 세계대회에서 17차례 우승하며 세계 정상급 기사로 군림했다. 한 시대를 지배한 승부사였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성취를 특별한 비법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2000승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 그는 “꾸준히 하는 게 참 좋은 일이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다”며 “나도 뭔가를 하다가 안 되고, 다시 하다가 안 되는 일을 몇십 번, 몇백 번씩 반복했다. 무한 반복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뭔가를 생각하고 하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일단 무조건 하고, 지루한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습관이 된다”며 “그 습관이 자기만의 무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40년 넘게 바둑판 앞을 지켜온 그가 전한 비결은 결국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는 태도였다.
전성기와 현재 가운데 어느 때가 더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뜻밖의 답을 내놨다. 한때 한국 바둑의 최후 보루로 농심신라면배 등 국가대항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그는 당시의 부담감을 털어놨다. 후배 최철한 9단이 전성기 시절과 지금의 생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 묻자 “성적이 좋았을 때는 사실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부담을 느끼는 성격이어서 아쉬운 부분이었다”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그때보다 편하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대회 우승을 거듭하고 한국 바둑의 간판으로 활약하던 시절에도 성적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의미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보다 결과에 대한 부담을 덜고 바둑을 둘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편안하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승부욕까지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목표를 잘 세우지는 않는다”면서도 “3000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지만 2500승까지는 욕심을 한번 내봐야 하나 생각해 본 것 같다”고 웃었다.
그의 바둑 인생에는 잊지 못할 승리와 아쉬운 패배가 함께 남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으로는 응창기배 결승에서 창하오 9단을 상대로 둔 승부를 꼽았다. 반면 아픈 기억으로는 유창혁 9단과 이세돌 9단에게 큰 승부에서 패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특히 유창혁 9단에 대해서는 “꼭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던 대국에서 오히려 진 경우가 많았다”고 돌아봤다.
인공지능(AI)의 등장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변화였다. 처음 AI가 등장했을 때는 충격이 커 2~3년 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기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른바 '기계치'라는 점도 적응이 늦어진 이유였다. 지금도 자신이 좋아하는 두터운 바둑을 선호하지만, 예전과 달리 전투적인 바둑에도 관심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현역 생활을 언제까지 이어갈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15년이 될지 모르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즐겁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