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 총선거가 명확한 승자 없이 끝난 가운데 대통령실이 새 정부 구성을 위한 정당들과의 협의 절차에 착수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이스라엘의 대통령은 평소 의례적·상징적 국가원수 노릇에 그친다. 하지만 지금처럼 베냐민 네타냐후(77) 현 총리와 야권 지도자 가디 아이젠코트(66) 장군이 서로 “내가 총리가 돼야 한다”며 다투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정부 구성의 우선권을 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4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이츠하크 헤르초그(66) 이스라엘 대통령은 이날 선관위로부터 지난 10월27일 치러진 크네세트 총선 결과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총 120석 가운데 현 총리 네타냐후의 리쿠드(Likud)당 및 그 지지 세력이 53석, 아이젠코트의 야샤르(Yashar)당과 그 지지 세력이 48석, 그리고 아랍계 정당들이 나머지 19석을 각각 얻었다. 현재로서는 과반 의석(61석 이상)을 차지한 정당 및 정당 연합이 없는 상황이다.
리쿠드당 일각과 극우 진영에서 “아랍계 정당들이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며 재선거 실시를 촉구하고 있으나, 선관위 측은 헤르초그 대통령에게 “부정 행위의 증거는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앞서 ‘외세가 아랍계 정당들을 통해 선거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신베트(Shin Bet)가 조사에 나섰지만 그와 무관하게 ‘선거 결과를 신속히 인증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헤르초그 대통령도 선관위 의사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재선거가 치러지는 것을 막고 이스라엘 국민을 위한 안정적이고 좋은 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어느 정당도 단독으로 집권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각 정당과 그 대표들은 ‘선거 전에 내건 모든 약속과 공약이 그대로 지켜질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헤르초그 대통령은 또 이스라엘 인구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아랍계 주민들에 대한 모욕 등 인종 차별을 규탄하며 “그런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에 설 자리가 없다”고 단호히 경고했다.
이스라엘 헌법상 대통령은 총선 후 크네세트 의원들 중 한 명에게 정부 구성의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재량이어서 꼭 의석수가 가장 많은 정당 지도자를 택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연립정부 구성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대통령이 보기에 정당들 간 타협을 잘 이뤄내 신속히 크네세트 과반 다수 의원들의 지지를 받는 연정을 출범시킬 수 있는 인물을 고르면 된다.
헤르초그 대통령은 과거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건설주택부 장관, 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강경 우파 성향의 리쿠드당이나 네타냐후와는 거리가 멀고 중도 성향의 아이젠코트와 더 가깝다고 하겠다. 다만 리쿠드당(27석)이 원내 1당이란 점을 들어 네타냐후가 정부 구성의 우선권이 자신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필치는 경우 헤르초그 대통령의 입장이 조금은 난처해질 수 있다.
네타냐후는 임기 중 부패 혐의로 기소돼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만약 그가 총리직을 잃으면 ‘국가 안보상 총리의 중요성’을 이유로 중단된 재판이 재개된다. 네타냐후로선 유죄 선고와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이스라엘 헌법상 대통령은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앞서 네타냐후의 절친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헤르초그 대통령에게 네타냐후 사면을 거듭 부탁한 바 있다. 이래저래 네타냐후의 운명이 헤르초그 대통령의 마음먹기에 달린 듯한 모양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