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조명과 스포트라이트가 연예계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매년 수많은 별들이 스쳐 지나가고 사라지는 무대에서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이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누군가의 어머니나 시어머니, 혹은 이름조차 없는 조연과 단역의 자리에서 일평생을 보낸다.
배우 나문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우로 데뷔해 수십 년 동안 화면 한구석을 채우던 인물. 톱스타의 그늘 뒤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시간이 자그마치 60년을 넘어선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밀려나 사라질 것이라 여겨졌던 인물은 70대 후반의 나이에 판을 뒤엎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국내 주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싹쓸이한 것이다. 공로상이 아닌 현역 최고 주연 배우에게 주어지는 왕좌였다.
시상대에 오른 그가 던진 한마디는 단순한 감격의 소회가 아니었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오늘 하루를 견뎌내는 수많은 생활인들을 향한 묵직한 자극이었다.
“나이 77세에도 여우주연상을 탄 제가 있으니 후배들에게 좋은 희망이 될 것 같다. 여러분들은 80세에도 대상을 타시라.”
나문희의 생존법은 거창한 영웅주의나 요행과 거리가 멀다. 그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현업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동력은 지독할 정도의 성실함과 일상에 대한 냉정한 관찰이었다.
연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현란한 기교를 말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TV 프로그램 ‘인간극장’과 ‘6시 내고향’을 시청하며 사람들의 삶의 결을 수집하는 것이 그의 루틴이다. 카메라가 꺼진 진짜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울고 웃는지, 어떤 표정으로 하루의 무게를 견디는지를 조용히 관찰해 온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안전함 뒤로 숨는 법도 없다. 노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가 남긴 언어는 서늘할 정도로 엄격하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나가야 한다. 매일 밖으로 나가서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마주쳐야 살아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가늘고 길게 연장하려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
위험이 두려워 집에 머물기보다 기꺼이 부딪힐 각오로 매일의 현장으로 몸을 던지는 일상. 이것이 80대의 나이에도 그가 현역 주연의 자리를 지키는 이유다.
그의 절제된 삶의 철학은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배우 김영옥과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깊은 우정을 이어온 비결을 묻자, 나문희는 상투적인 우정 예찬 대신 아주 현실적이고 건조한 관계의 법칙을 던졌다.
“친해도 서로 조심할 건 조심하는 사이다. 아무리 가까워도 경우를 지키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다.”
가까운 사이라는 핑계로 예의를 저버리거나 선을 넘는 순간 인연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몸소 체득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일정한 선과 격식을 지키는 절제미. 일터에서나 사람 사이에서나 요행을 바라지 않는 그의 단단한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빛나는 조명 뒤에서 그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원칙 또한 냉정하다. 자신이 맡았던 인상 깊은 역할이나 자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배우에게 넘어갈 때도 그는 결코 흘러간 영광에 연연하지 않는다.
“아쉽기도 하지만 내 몫이 아니면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양심이 있으면 과한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대중이 기대하는 ‘따뜻하고 완벽한 어머니’라는 환상 역시 솔직하게 거부한다. 스스로를 대단한 스타가 아닌 단지 하루하루의 임무를 처리하는 ‘연기 노동자’이자 일상의 평범한 존재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동네 대중탕에서 사람들과 요구르트를 나누어 먹으며 건강을 다지는 일상이야말로 그가 배역을 준비하는 바탕이다.
주연의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조연으로 밀려나 있던 시간. 그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을 버텨낸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담백하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다.”
지나간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늘이라는 하루를 정직하게 가꿔낸 이만이 뱉어낼 수 있는 고백이다.
세상은 늘 화려한 주인공만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긴긴 세월 동안 그늘 뒤에 서 있다가 끝내 스스로의 힘으로 판을 뒤엎은 나문희의 서사는 말해준다. 진짜 승부는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매일의 루틴을 버텨내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77세에 여우주연상을 머리에 얹고 “80세에도 대상을 타라”며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은, 오늘 하루도 제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내는 모든 이름 없는 조연들을 향한 단단한 응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