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에 반대하는 미국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한 데 이어 텍사스주를 포함한 주요 데이터센터 집결지역의 주지사 자리까지 휩쓸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민주당 압승으로 AI 데이터센터 증설에 제동이 걸려 반도체 산업의 장기 호황을 장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성장률에도 부정적인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7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이번 중간선거 주지사 당선인 36명 중 34명이 데이터센터에 대한 규제나 제한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예 ‘개발 일시 중단’을 공약으로 내건 당선인도 12명이나 됐다. 이들은 데이터센터가 전력 소비를 늘리고 수자원을 고갈시켜 주민들의 전기요금 인상과 자원 부족을 야기한다고 비판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집중된 텍사스·조지아·오하이오주의 민주당 소속 주지사 당선인들은 데이터센터 신규 건설 중단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미국 전체 데이터센터 계획 용량의 약 25%를 차지하는 텍사스주 주지사 당선인 지나 이노호사가 전기요금과 용수 사용 등 주민 보호를 위한 법률이 마련될 때까지 신규 데이터센터 승인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데이터센터 건립에 대한 여론까지 나빠지면서 미국 현지에서는 데이터센터 축소가 기정사실화하는 모습이다. 여론조사기관 SSRS가 실시한 미국 전국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도 61%가 거주지 주변 건립을 반대할 만큼 데이터센터는 ‘혐오시설’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여론을 등에 업은 정치인들의 데이터센터 건설 제한 조치가 확산할 경우 미국 전체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 용량의 약 45%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AP통신은 “업계의 가장 큰 지지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 차원의 규제 확대를 미루더라도, AI 대기업과 데이터센터에 대한 규제 환경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빅테크(거대기술기업)에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도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메모리 업체는 글로벌 빅테크의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힘입어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공급을 늘려 왔다. 신규 데이터센터 착공이 늦어지면 AI 가속기와 서버 설치 일정도 조정될 수 있다. 이는 곧 메모리 반도체 수요 감소로 이어진다. 반도체 초호황이 조기에 종료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 업계의 실적 지표로 꼽히는 D램 현물 가격은 이미 하락세로 돌아섰다. 지난 6일 DDR5 16Gb D램의 현물 평균가격은 60.167달러로 전 거래일보다 0.82% 내렸다. 전날에도 1.09% 떨어져 이틀 연속 약세다. 현물가격은 대리점 등에서 그날그날 거래되는 가격으로, 기업 간 거래에 쓰이는 고정거래가격의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반도체 산업 피해가 현실화하면 우리 경제에도 적잖은 타격이 예상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반도체 호황 덕에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기보다 1.0% 성장했지만, 민간소비는 재화와 서비스 모두 0.2% 감소했다. 반도체가 수출과 설비투자 실적을 견인하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K자 양극화가 심화하며 내수 경기는 좀처럼 활기를 띠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발 반도체 악재가 자칫 우리 경제의 성장세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다만 아직까지 AI 투자나 반도체 수요가 위축되는 등의 신호는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부 진단이다. 또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빅테크 등 주요 고객사와 장기공급계약(LTA)을 맺은 점을 고려하면 당장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한국이 지금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투자를 멈추거나 늦춰선 안 된다”며 “미국이 주춤하더라도 중국이나 프랑스, 캐나다 등 다른 국가들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전날 페이스북에 올린 ‘우리는 충분히 절박한가? 우리는 그러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강한 위기감을 드러내며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과감한 규제 혁파를 강조했다. 김 장관은 “중국의 변화와 발전 속도에 다시 한번 놀랐고, 솔직히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정부 때문에 기업이 기회를 놓치거나 속앓이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면서 “규제 하나라도 더 풀고, 기업이 겪는 어려움 하나라도 더 해결해야 한다”며 초광역특구법을 통한 규제 완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