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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위에 서있는 한국인의 슬픔]⑥왕야이에서 시작된 ''포로감시원'' 한국 청년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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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포로학대죄'' 처형… 유골마저 팽개쳐져
연합군 포로감시원 청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인이었다. 한국이 일제 식민지로 병탄되어 창씨개명을 당함으로써 국적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타이멘철도 공사현장에 온 그들은 일본군과 똑같은 군복에다 얼굴도 비슷했고, 일본말을 하는 데다 서류 작성 때는 일본 글을 썼기 때문에 포로들 눈에는 일본인으로 비쳤다. 무엇보다 연합군 포로 대부분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몰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 청년들은 연합군 법정에서 포로학대죄로 단죄되어 B, C급 전범이라는 엄청난 명칭을 얻었다. 판결문에는 그들 국적이 일본인이었고 일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변호인으로 온 일본 변호사 누구도 그들이 한국인이며, 그들의 행동은 그들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일본군의 거역할 수 없는 강제력으로 강요된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사형이 선고된 청년들은 싱가포르 창기(Chang-gi) 형무소에서 사형되었고, 형 집행 때는 일본 정부에서 파견된 일본 승려가 참관했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유골은 형무소 뒤뜰에 가매장되었다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처형 당시 국적인 일본으로 보내지고, 죄수들도 함께 도쿄 스가모(巢鴨)형무소로 옮겨졌다. 유골과 산 사람들이 일본으로 온 뒤부터 일본은 표변했다. 유골과 죄수들이 조센징이라며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함께 송환된 일본군 유골은 특별하게 마련한 신사나 사찰에 안장되고 여러 종류의 법률을 제정하여 유족들에게 보상하고 영혼을 위로했지만, 한국 청년들의 유골은 지하 창고에다 처박아 버리고 형무소에서 잔여 형기를 보내는 이들을 모욕하고 능멸했다.
다나카 이치준이라는 일본인 승려가 있었다. 창기형무소에서 한국 청년들이 B, C급 전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될 때 참관했던 사람이다. 그는 한국 청년들의 유골이 버려져 있는 것을 그의 사찰인 쇼우우엔(照榮院)으로 가져다 분향하고 위로하는 의식을 베풀어주었다.
한편 스가모형무소에서 옥살이하던 한국 청년들은 1955년 이후부터 가석방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뒷날 동료의 유골이 머물렀던 쇼우우엔 뒷산에다 위령비를 세우고 동료들의 외로운 한국 이름 석자를 새겨주었다. 나는 뒤늦게야 이 일을 알고 위령비를 찾아가 참배했다. 위령비가 있는 숲에서 잠시 참배하는 동안 모기 떼의 급습을 받았다. 순식간에 몰려온 모기 떼는 팔과 목, 얼굴을 물어뜯었다. 그토록 많은 모기에게 물려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약국에서 모기약을 사 발랐지만 가려움과 통증은 한참 더 지속되었다.

◇왕야이에 동원되었던 현지 주민 중 한 사람인 분이(79·오른쪽)씨가 당시 상황을 필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모기약을 들고 태국의 깐짜나부리까지 왔다. 깐짜나부리 역에서 타이멘철도를 운행하는 기차를 탄다. 콰이강의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에서 북쪽으로 70km쯤 가면 왕야이(Wang-yai)라는 기차역이 나타나리라. 왕야이는 한국 청년들이 전범이란 누명을 덮어쓴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지명이다. 1942년 11월 13일 부산항을 떠난 한국 청년들이 74일 만에 도착하여 포로감시원의 임무가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실감한 대나무 정글이다. 홍종묵의 수기에는 논브라독에서 배를 타고 콰이강을 거슬러올라 왕야이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 청년들이 탄 배가 깐짜나부리를 지날 무렵에는 아직 콰이강의 다리가 놓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리 공사가 시작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홍종묵의 일행이 왕야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지타(和田)라는 책임자를 비롯해 소대장인 우스키(臼木) 소위, 히라마쓰(平松) 조장, 나카무라(中村) 군조, 하시모토(橋本) 군조, 후쿠다(福田) 군조가 한국청년들을 지휘하기 위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인 다섯 명이 한국 청년 30명을 장악하여 포로수용소를 운영할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나머지 한국 청년들도 각각 배속이 결정되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 이미 철도공사가 시작되고 있어서 공사 구간별로 작업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홍종묵과 30명의 군속들이 배속된 제4분소는 제4포로수용소를 뜻했다. 분소는 타이멘철도 공사현장 수십 곳에 배치되었는데, 그 규모는 해당 구간의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사의 위험성과 노동력 필요성에 따라 각각 달랐다. 따라서 분소에 따라 군속 숫자가 저마다 달랐는데, 일본군 한 명이 군속 10명을 맡아서 무섭게 관리했다. 포로들과 직접 상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군속 몫으로 하고 일본군은 언제나 군속의 등 뒤에서 총구를 겨눈 채 유령처럼 지배했다.
제4분소에 배치된 군속들은 도착 첫날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작업에 앞서 제4분소 소장의 연설이 있었다.
“우리는 천황 폐하의 통솔을 받들어 오직 따르는 것만을 본분으로 삼는다.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 폐하의 명령이다. 따라서 명령 불복종은 총살형이다.”

작업은 터닦기였다. 일본군이 거처할 병사, 군속들이 살게 될 막사 터, 그리고 포로들을 수용하게 될 건물의 터를 닦는 작업이었다. 산비탈을 깎아서 집터를 만드는 작업은 시작부터 곤경에 처했다. 무더위와 폭우 속에서 작업은 몹시 어려웠다. 굵은 대나무들이 정글을 이루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나무들은 마치 모아 심은 것처럼 무더기를 이루어 자라고 있었다. 철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나 장비는 어느 정도 갖췄는지 모르겠지만 집을 짓는 데 꼭 필요한 도구나 장비는 전혀 없었다.
궁리 끝에 현지 주민들을 찾아가서 작업도구를 빌리기로 했다. 깊은 산중에 사는 사람들은 원주민들이었다. 빌린다고는 말하지만 사실상 탈취였다.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낫처럼 생긴 키여우와 녹슬고 닳아빠진 삽, 곡괭이 몇 자루를 빼앗아왔다. 하지만 작업도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다시 궁리한 끝에 원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을 시키기로 했다. 일본군이 짜낸 이 계획을 실천하는 데는 이미 친일파 앞잡이가 되어 있는 원주민 대표가 나서 주민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했다. 일하면 높은 품삯을 주고, 일본에서 새옷과 좋은 식료품이 도착하면 나눠 주겠다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의심 없이 응했다.
대나무 뿌리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면서 밤낮없이 20여일 동안 일한 끝에 제법 널찍한 집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군 숙사를 짓고 군속들 막사도 지었다. 땅바닥에다 티크나무 판자를 깔고 대나무를 휘어서 지붕을 만들고 열대수 가지와 잎을 덮었다. 일본군 막사는 천막을 덮었고, 포로들이 거처할 막사는 지붕만 대충 가려놓아 큰비를 피할 정도로만 지었다. 그들이 지낼 바닥이나 침상은 그들이 도착하여 스스로 만들도록 했다.
20여일 동안의 작업 중에도 풍토병이 그 위세를 떨쳤다. 먹는 음식이 워낙 적은 데다 영양가가 없다 보니 허기가 심해 어지럼증을 앓는 사람이 자꾸 생겼다. 깔람피라 부르는 시든 양배추 몇 이파리에다 돼지감자로 알려진 타피오카 몇 조각을 썰어 넣은 소금죽에다 주먹밥 한 덩어리가 식사였다. 배고픈 나머지 함부로 도랑물을 마신 사람들은 금방 피똥을 쏟았다.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생수를 그냥 마셔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누가 물을 끓여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프다고 쉬거나 무슨 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살아서 돌아가려면 무조건 참아야만 했다. 수용소 시설이 엉성하게나마 모습을 갖추고 나자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깐짜나부리에 있는 포로수용소 본대까지 가서 포로를 끌고와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쇼오우엔 뒷산의 위령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