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초부터 벌이는 ‘물가와의 전쟁’이 심상찮다. 자신감 넘치던 물가당국자들의 어깨는 축 늘어지고 지금은 말 그대로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 돼버렸다. 파상적으로 몰아치는 외부충격에 물가 ‘3% 목표’ 달성은 물건너갔다는 시각이 대세다. 원자재가격 폭등으로 인한 공급 측면에 문제가 있다던 정부가 수요측면의 어려움마저 시인하며 금리인상에 기대려는 모습이다. 성장에만 매달려 물가 관리의 타이밍을 놓치더니 이젠 두 손 들고 책임회피성 뒷북 대응에 나선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자신감 잃어가는 당국
당당한 체격, 탄탄한 실력에 거침없는 태도로 카리스마 넘치던 윤증현(사진) 기획재정부 장관을 최근 본 사람들은 “장관님이 올 들어 많이 늙은 것 같다”고 말한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는 데 선봉장이던 그가 요즘 하는 발언들은 ‘우울한 톤’투성이다.
윤 장관은 9일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수요정책포럼 강연에서 “물가 불안으로 전반적인 불확실성이 높아 우리 경제의 회복흐름이 계속될지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물가상승은 이상한파와 구제역으로 인한 농축산물의 공급 위축과 국제유가 상승 등 공급부문 충격에 기인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인플레 기대심리와 경기 회복에 따른 수요측면 물가압력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세수만 줄고 효과가 없다던 유류세 인하까지 포함한 유가 단계별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존에 그가 했던 발언 성향을 감안해 보면 이는 물가에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수요 측면의 물가압력을 시인한 발언은 기준금리가 결정되는 금융통화위원회 개최 하루 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윤 장관은 전날 국회에서도 “물가가 심각한 수준인데 주무장관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야당의원의 공격에 “짐을 내려놓고 싶다”면서 물가관리의 고충을 토로했다.
◆스스로 ‘물가 함정’ 판 MB노믹스
정부는 지난 1월 중순 물가안정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물가불안 심리가 금세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구제역이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데다 이상한파까지 겹치고 유가급등까지 터지면서 물가 당국자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중동 민주화 물결이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바레인 등으로 번져가면서 국제유가는 배럴당 110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국제유가는 물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성장과 수출, 대기업에 ‘올인’한 MB노믹스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고환율과 저금리를 고집하면서 어느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며 총대를 멨던 재정부가 물가폭탄에 휘청거리면서 슬그머니 금리인상과 유류세 인하에 기대려 한다는 비난이다. 사태 악화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뒷북 대응인 셈이다. 아울러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기업을 옥죄며 제품가격 동결 내지는 인하를 압박하면서 물가를 근근이 억누르던 정부가 가장 심각한 변수인 유가복병을 만나 ‘백기 투항’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김건호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정부가 고환율·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면서 시중에 유동성을 늘리고 물가상승을 초래했다”며 “물가를 잡기 위해 개별품목 가격을 통제하다 보면 언젠가 공공요금 등 다른 분야 물가가 큰 폭으로 올라 서민에게 더 큰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상재 현대증권 경제분석부장도 “이머징 국가들이 금리인상에 적극 나서는 동안 우리만 지연한 게 물가에 악영향을 끼쳤다”며 “물가가 올 상반기 중에는 4% 이상으로 꾸준히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상혁·이귀전 기자 next@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