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있는 서양 선교사 묘지와 명·청 시대의 천주교회를 처음 찾아간 것은 한·중 수교 1년 전인 1991년 7월25일이었다. 그 후 두세 번을 다시 찾았지만 나는 지금도 처음 찾았을 때의 그 뭉클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20년 전 그때 중국 여행은 한없이 불편했고 베이징의 날씨는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공식 안내인 겸 감시자로 따라다니던 중국 외교부 산하 직원은 손에 달랑 ‘열하일기’ 한 권을 들고 2시간이 넘게 묘지를 찾기 위해 무더위 속에 부성문(阜成門) 밖 거리를 헤매게 하는 나를 향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200년 이전에, 그것도 조선의 한 여행자가 쓴 책을 어떻게 믿느냐, 외국인 선교사의 무덤을 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며 계속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의 이 같은 불평은 남당(南堂)과 북당(北堂)이라 부르는 천주교회를 찾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술 더 떠 외국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곳이라며 못 가겠다고 버티는 통에 돈을 찔러주며 사정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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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시청(西城)구에 있는 서양선교사 묘지. 마테오리치가 묻힌 것을 계기로 명·청 시대 서양 선교사들의 묘지가 됐다. 문화혁명 당시 극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기도 했다. |
그런데 내가 찾아갔을 때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 湯若望) 등 명·청 시대 외국인 선교사 묘역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부서진 채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는 패루와 석비들이 문화대혁명이 저지른 야만적 파괴를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었다.
박지원, 정약용, 홍대용 등 우리가 실학파, 북학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서양 선교사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이 당시 중국과 한국의 어떤 지식인들도 도달하지 못한 뛰어난 수준의 과학적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제작한 지도와 달력을 보고, 이들이 저술한 수학·물리·천체관측 등에 대한 책을 읽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불원천리 연경(베이징)까지 찾아가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자 했다. 예컨대 박지원보다 먼저 1766년에 베이징을 방문했던 홍대용은 천주교회를 찾아 서양 선교사들을 만났다. 이들과 만나 비록 필담이었지만 서양 과학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는 ‘유포문답(劉鮑問答)’에서 다음처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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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南堂). 1610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세운 베이징 최초의 천주교회. |
‘유포문답’에서 ‘유(劉)’는 당시 흠천감(欽天監)의 최고 책임자였던 감정(監正) 할러슈타인(Augustinus von Hallerstein, 중국명 劉松齡)을 가리키며, ‘포(飽)’는 부감(副監)이었던 고가이슬(Antonius Gogeisl, 중국명 飽友管)을 이른다. 홍대용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구의 둘레가 36만Km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 “땅이 한 번 돌아 하루가 된다고 논하였다”라는 말로 보아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가진 과학적 지식에 대해 “그 설이 미묘하고 심오하다”고 찬탄을 금치 않았다. 그렇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그 천루(淺陋)함은 가소롭기 그지없다”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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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오 리치 |
또 황제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중국에서 효과적인 선교는 황제를 개종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평민에 대한 선교를 포기하고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서 황제에게 접근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세속의 관직이 거꾸로 목적인 선교활동을 방해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관직을 탐내는 중국인 경쟁자들의 시기와 모함에 끊임없이 시달렸기 때문에 목적인 선교활동보다 과학지식을 실용화하고 더 정확하게 체계화하는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시간, 갈등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중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오랫동안 고민한 사람이었다. 홍대용이 “상제(上帝)의 이름을 훔치고”라고 말한 것이나 “불가의 윤회설로 겉치레를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리치의 고민, 다시 말해 문화의 번역에 따르는 어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다.
리치는 중국어의 어떤 단어도 기독교의 ‘하나님’이란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리치는 오랜 고민을 거쳐 중국어의 ‘상제’란 개념이 야기할 오해를 십분 예상하면서도 유교 경전에 나오는 ‘상제’란 단어를 선택했다. 이 선택은 펑잉징(馮應京)이 ‘천주실의(天主實義)’ 서문에 쓴 것처럼 리치가 ‘이중화중(以中化中)’의 태도, 중국을 빌려 중국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경전까지 활용하며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가톨릭의 교리를 설명한 이 책은 리치가 중국의 전통과 학문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주교에 대한 홍대용의 혹평은 설득력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가진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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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 샬 |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후 광동(廣東)의 조경(肇慶)으로 옮겨 6년 동안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익히고, 고전을 공부하는 데 전념하여 한시를 능숙하게 지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러고는 추방과 몰이해 속에서도 꾸준히 중국인 지인을 만들어 나가며 조금씩 베이징을 향해 다가갔다. 만력제(萬曆帝)가 자명종을 보고 싶어 한 것을 계기로 1601년 드디어 연경 거주 허가를 받아낸 리치는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중국 고관들을 사로잡으며 ‘서양에서 온 선비’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605년 선무문 안에 ‘남당(南堂)’이라 불리는 천주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마테오 리치가 세우고 아담 샬이 전면적으로 개축한 남당은 고딕식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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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당(北堂). 1703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장 드 퐁타네가 세운 천주교회. |
병자호란 때에 볼모로 잡혀 심양(瀋陽)에 와 있던 소현세자는 1644년 관내로 들어가는 청군을 따라 연경에 와서 70여 일 동안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선무문 내 주원(住院)에 있던 아담 샬을 자주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소현세자는 “우리나라의 역법이 결점이 너무 많고 몇백 년 전부터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수하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전수할 것을 요청했고 아담 샬은 승낙했다.
그리고 샬이 보내 준 선물에 대해 “천구의와 양서류는 이 세상에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는데 저한테 보내주시다니 꿈처럼 기쁠 따름입니다”라는 답신을 보내면서 자신이 귀국할 때 서양의 과학을 전수해줄 인물을 대동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조선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총명함과 실천력을 지녔던 소현세자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선에 돌아오자 공리공론과 당파적 이해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인조의 밀명으로 제거된 후 조선은 허망한 북벌론과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렇지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사용하는, 아담 샬이 만든 시헌력(時憲曆)의 정확성을 보았던 사람들에 의해 역법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후 서양의 과학문명을 배우려는 조선 지식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농업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헌력 제작의 원리를 배우기 위해 수년간에 걸쳐 사은사 김육(金堉), 일관 김상범(金尙范)과 허원(許遠) 등 수많은 사람들이 연경을 찾아 인맥과 뇌물을 동원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시헌력 오성법(五星法)을 습득하여 1708년부터 이 역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서양문명의 만남에 대한 한심하고 애절한 행태들을 떠올리며, 문화대혁명의 파괴가 과거의 그 한심함을 더욱 한심하게 만드는 가운데 나는 남당을 떠났다.
홍정선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