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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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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편지를 읽는 신부가 있다. 가슴으로 읽는다는 말은 그저 동원한 수사가 아니다. 이 늙은 신부는 앞을 보지 못한다. 누군가 읽어주는 편지를 들을 수밖에 없으니 이 경우 가슴으로 읽는다는 말은 사실에 가깝다. 이 신부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해 성경 구절 역시 가슴으로 배웠다. 최근 개봉된 핀란드 영화 ‘야곱신부의 편지’에 등장하는 사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숲 속의 낡은 집에 홀로 사는 늙은 사제는 그에게 오는 편지들을 읽고 답장을 보내는 일로 일상의 대부분을 채운다. 손자가 제대해서 어떻게 자리를 잡을지, 연구가 잘 풀리지 않는다든지, 남편의 폭력이 고통스럽다는 것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적어 기도해달라는 편지들이다. 야곱은 그에게 편지를 읽어주던 이웃집 부인이 요양원에 가는 바람에 ‘가슴의 눈’을 잠시 잃어버렸는데, 그 부인을 대신해 찾아온 이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살다가 야곱의 청원으로 사면받은 레일라라는 여인이었다.

밤의 영화관에 관객은 많지 않았다. 핀란드의 햇빛과 바람과 수목이 잔잔한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맑고 애잔한 피아노 음악이 흘러다녔다. 세상과 인간에게 담을 쌓았던 레일라가 언니의 편지를 읽으며 마음의 빗장을 여는 클라이맥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 뒤돌아보니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제야 주변에 듬성듬성 관객들이 그리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안 것인데, 젊은 세대는 보이지 않았다.

작금의 청춘들이 고전적인 ‘편지’에 감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단순히 세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구촌 어디에 있든 실시간으로 통화하고, 문자 주고받고, 얼굴까지 보여주는 광속커뮤니케이션 시대에 고전적인 소통수단인 ‘편지’의 의미는 퇴락한 지 오래다. 이메일조차 이제 구닥다리 반열에 올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를 살며 무차별 대중에게 빛의 속도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는 형국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양과 속도만 놓고 보면 이 시대 대중은 외로울 틈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자살률은 높고, 왕따는 하소연할 데가 없고, 부모 자식 사이에는 냉기가 돈다. 오늘은 작심하고 가슴으로 이메일이라도 써보는 건 어떨까.

조용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