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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김경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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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고뇌·가난… 고흐 보면 공감가는 부분 많죠”
그림 속에 고흐가 색소폰을 불고 있다. 작품 이름은 ‘Gogh’s blues’다. 고흐의 열정, 고뇌, 가난 등을 고흐가 즐겨 사용하던 블루와 옐로로 묘사했다. 고흐가 서울 강남의 밤무대에 섰음 직한 모습이다. 작업실 바닥에 데생 종이가 깔려 갈 즈음에 얻어진 이미지다. 직접 색소폰을 불어 보면서 표정을 잡아 나갔다. 그래도 어려운 것은 눈의 표정.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고흐를 불러냈다.

우리 시대의 고흐로 불려지는 김경렬(57) 작가. 그의 경기도 장흥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한창 고흐를 그리고 있었다.

“왠지 저로서는 공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 인물이지요. 열정, 고뇌, 가난이 특히 그렇습니다.”

가난은 미술학도를 꿈꾸던 그에게 미술학원 문턱조차 넘을 수 없게 했다. 입시미술을 공부하지 않고 미술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종이와 연필만 사달라고 했어요. 을지로에 가서 데생 종이를 사서 짊어지고 왔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석고상 데생만 2000여장을 했을 겁니다. 완전히 독학이지요.”

부모는 그가 미대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타협점이 홍익대 응용미술(디자인)과였다. 입시장에서 주변 응시생들이 그의 데생을 보고 모두가 웃었다. 하지만 왜 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당히 그는 합격을 했다.

“입학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과 동료들이 제 데생하는 모습을 보고는 웃었어요. 그런데 데생이 완성된 후 모두가 조용해졌지요.”

고흐가 트럼펫을 불고 있는 작품.
그는 십자형태를 그려 중심을 잡거나 석고상을 향해 연필을 들어올려 비례를 계산하지 않고 육감적으로 데생을 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학교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즈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그는 졸지에 가장이 됐다.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삶의 길이 안 보였어요. 논어나 채근담에 나오는 글귀로 저를 다잡았지요. 입시미술학원에서 강사로 뛰면서 학비는 물론 생계까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설상가상 그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고생도 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몸을 추슬러 절박한 삶을 곧추 세웠다.

“한창 아내와 연애하던 시기였지요. 과 선배였던 아내와는 졸업작품을 도와주면서 가까워졌습니다. 과 선배들이 그림만 도와주고, 그 이상은 안 된다고 엄포를 놨어요.”

그는 연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입대를 한다. 연인은 수십곳의 부대를 직접 발로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왔다.

“제 처지를 고려해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고 했지요. 저만치서 다가왔던 아내의 눈물어린 모습이 요즘도 선합니다.”

그는 3학년으로 복학하던 해에 결혼을 한다. 아내는 이미 졸업해 미술선생이 됐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해 주는 밥을 먹어야겠다며 학교에 나가는 아내를 못마땅히 여기셨지요. 결국 아내가 학교를 그만뒀어요. 당시만 해도 저는 어머니 말씀에 거역을 못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대기업 디자인실에 당당히 입성을 한다. 모든 것이 잘나갔지만 그는 3년 만에 일을 그만둔다. 무모한 짓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작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지하차고를 개조한 셋방에서 살았어요. 어린 아들녀석의 팬티가 자고 나면 늘상 젖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줌을 쌌다고 생각해 야단을 자주 쳤지요. 나중에 지하 습기가 흘러 흥건히 젖게 된 것을 알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는 습기로 썩어가는 캔버스와 아들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았다. 강해지지 않으면 그마저 썩어버릴 것만 같았다. 잡지사의 삽화 일은 물론 프리랜서로 일러스트 일도 했다. 얼음을 깨고 도미가 튀어 나오는 유명 가전사의 냉장고 광고 일러스트도 그가 한 일이다.

“아내가 옆집에서 돈을 빌려다 줘 물감을 사서 한 일러스트지요. 1980년대 초 20호 크기의 일러스트를 500만원까지 받았어요.”

그는 1989년 첫 개인전을 연다. 물속 풍경과 인물 작품들이 생각지도 않게 모두 팔려 자그마한 집까지 장만을 한다. 1990년도 들어선 국제무대에 눈을 돌려 일본 프랑스 미국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의 사나이로 통하는 그는 근래 들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졌다. 좀더 자신의 감성을 끌어내 그 자신이 그림을 그리면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소신에서다. 그림에 신명이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작가는 어느 부분에서 자위행위 같은 유희적인 영역을 스스로 만들어서 즐길 줄 알아야 창작의 고통을 견딜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작가가 즐겨야 관람객도 그림을 즐기게 되지요. 상대만 즐기게 해주겠다는 것은 복종에 지나지 않지요.”

그의 고민은 둘을 동시에 어떻게 섭렵하느냐 하는 문제다. 외형적 리얼리티가 아닌 ‘쓰라린 행복’ 같은 감성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이유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링컨을 그리고 있는 김경렬 작가. 자전거 전국일주로 30대의 몸상태를 가지고 있는 그는 요즘도 서울 집과 장흥 작업실을 자전거로 오가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탕을 그려 형태를 드러나게 하는 맛이 상쾌함을 선사합니다. 예를 들어 흰 머리카락도 여백을 놔두고 바탕을 칠해 드러나게 하지요. 시간이 더 걸리지만 경쾌한 깊은 맛을 주지요.”

그는 채색에서도 유화물감을 동양화의 담채기법처럼 사용한다. 유성을 수성처럼 쓰는 기법이다. 수간채색이라 할 수 있다. 디테일하면서도 깊이와 생동감이 생긴다. 어둠도 검정 빨강 파랑 등 3원색을 다 사용해 만든다. 시커면 암흑이 아니라 경쾌한 어둠이다.

“제 그림의 심화 과제는 풍부한 감성에 있다고 봅니다. 삶에 무뎌진 감성을 벼려야 합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이다. 언젠가 어디서 본 듯한 사람에서부터 유명한 역사적 인물에 이르기까지 그림으로 담았다. 그의 일관된 작가 정신은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그는 정직하게 누구나 아는 사실적 표현으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있음직한 이야기들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때로는 낯설고 거칠게 느껴졌지만, 재치와 음악과 인물의 새로운 조합으로 우리의 감성을 두드린다.

김경렬은 뭐든지 낯설게 그린다. 익숙한 사람도 그의 캔버스에 들어가면 낯설다. 누군가는 거칠고 생경하다고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도 이 세상에서 낯설다고 한다. 익숙한 것이 뭐가 있냐는 것이다. 사실 알면서도 모른는 것이 태반이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쪽으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렸다. 그가 그리는 것은 어디서 본 듯하지만 정작 낯선 ‘real’이다. 모든 게 김경렬의 ‘real’인 것이다. 마치 그가 자신을 ‘real Kim’이라 불렀던 것처럼.

그가 다시 담배꽁초를 찾아 입에 문다. 폐결핵 말기까지 가서 몇 번 끊어도 봤지만 불안한 생활 속에서 그를 참고 견디게 한 것은 담배였다. 담배를 끊으면 그림에 대한 강박감에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는 고통과 마주해야만 했다. 누군가 말했다. 김경렬은 우리에게 찾아온 고흐라고. 시대도 국적도 다르지만 고흐가 오늘 우리나라에 환생했다면 김경렬일지 모른다.

최근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에 서 있는 중국 주류 미술계가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내 작가론 처음 있는 일이다. 내년 중국 측 기획전으로 추진되는 한국작가 초청전에 그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