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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피케티, 진작 우리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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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경제학자가 불 지핀 소득 불평등 문제 심각
‘성장’ 회귀 정부 정책 양극화 해소할 수 있나
자본수익률(r)은 경제성장률(g)보다 항상 높다. 올해 세계 경제학계를 휩쓸고 있는 ‘피케티 이론’의 핵심이다. 40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이 같은 부등식 ‘r 〉 g’로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초래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자본이 스스로 증식해 얻는 소득 증가율이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소득 증가율보다 항상 높기 때문에 소득격차가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임대료나 배당처럼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에서 얻는 불로소득이 땀 흘려 벌어들이는 임금을 늘 앞질러 불평등이 심해진다는 얘기다.

피케티의 역사적인 발견, ‘r 〉 g’는 자본주의 세상이 ‘세습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섬뜩한 경고다. 자본이 쌓여갈수록 양극화는 심해지고 그런 세상에선 재능이나 노력보다 태생이 개인의 삶을 결정짓게 된다. 1914∼1949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주춤했던 이 부등식은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면서 다시 뚜렷해졌음을 ‘21세기 자본’은 보여주고 있다.

‘r 〉 g’를 함부로 반박하기는 어렵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부등식은 피케티가 15년간 20여개국의 300년 데이터를 분석해 얻은, 단단한 결과물이다. 피케티는 이처럼 방대한 작업의 결과를 무기로 자신만만하게 불평등 논쟁에 불을 댕겼다.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석학 폴 크루그먼은 일찍이 “불평등에 대한 훌륭하고 압도적인 고찰”이라며 “향후 10년간 가장 중요한 경제서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반면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자본 소득을 저하시키거나 한계를 짓는 요인에 대해선 검토하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통계 오류 등을 지적하며 “피케티는 틀렸다”고 쐐기를 박았다. 피케티 열풍이 상륙한 작금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그 논쟁에 뛰어들어 어느 한쪽 편에 서려는 게 아니다. 그의 역사적 발견은 앞으로 두고두고 숱한 논쟁을 거치며 검증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피케티가 불을 지핀 불평등 문제가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이슈인가 묻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불평등에 관한 그의 문제의식은 불과 2년 전인 2012년 내내 우리 사회를 휩쓸었다. 대선전이 한창이던 당시 박근혜, 문재인 여야 후보들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복지 공약을 쏟아내며 치열한 레이스를 펼쳤다. 불평등·양극화 해소가 대선 승패를 가를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것인데, 피케티 이론으로 설명하면 r 〉 g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시대적 고민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류순열 선임기자
‘21세기 자본’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 피케티는 그렇게 우리 사회에 상륙해 있었다. 적어도 그 당시 여야 정치권은 피케티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경제민주화’였고, 이를 선점한 박근혜 여당 후보는 승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는 수술대에 오를 줄 알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 공약, 경제민주화는 양적 성장에 매몰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줄기는 바뀌지 않았다. 박근혜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민주화는 시늉만 하다 자취를 감춰버렸고, 빈자리는 다시 신자유주의적 성장 목표가 채웠다. 양극화를 해소하지 않고는 지속적인 성장도 어렵다면서 경제민주화로 표를 얻고는 다시 성장만 하면 분배도 좋아질 거라는, 뜬구름 같은 낙수경제이론으로 회귀한 꼴이다. 그렇게 피케티 문제의식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떻게든 경기를 살려보려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열정이 불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빚에 짓눌려 있는 가계에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유혹하는 건 특히 위험해 보인다.

양극화 세상에선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를 달성한다 해도 이를 체감하는 국민은 소수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부채에 짓눌린 연소득 5000만∼1억원의 가계’(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는 빚 부담을 덜어야 비로소 지갑을 열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회귀한 ‘근혜노믹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최경환노믹스’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아가 피케티 부등식을 누그러뜨리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류순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