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출판

입력 :
수정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임시직 느릿느릿 배밀이로 나아가는 그 길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달팽이’)

김사인(59) 시인은 9년 만에 펴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고독하지만 끝까지 가고자 한다. 그 길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시인도 정확히 그 지점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가는 길이 어느 방향인지는 막연히 알지만. 망해버린 왕국의 고독한 표지를 뿔처럼 꽂고 더듬더듬 끊임없이 길을 간다. 그가 어렴풋이 찾은 그 길의 윤곽은 목포에서 희미하게 드러난다.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나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가리라”(‘목포’)

가고자 하는데 졸음 때문에 타고 갈 통통배는 멀어진다. 그 졸음 한가운데로 물길은 보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 보인다. 시인은 잠의 한복판에서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고 다짐한다. 잠속에서도 가 닿고 싶은 종착지는 어디인가. 충북 보은, 수몰지로 남은 고향의 추억인가.

“차라리 귀가 없었으면 싶었다./ 동틀녘 바람 맵고/ 턱이 굳어 말도 안 나오던/ 두산 삼거리/ 언 발로 얼음을 구르며 차를 기다렸다./ 광목 수건을 꽁꽁 동이며// 젖이 분 새댁은 주막집 부엌에 들어가/ 울며 아픈 젖을 짜내고/ 흐른 젖에서는 김이 오르고/ 김치 그릇 미끄러지는 밥상을 든/ 어린 식모는 손등이 터졌다.// 내다보는 눈이 아릴 때까지/ 보은 가는 첫차가 오지 않았다.”(‘첫차’)

보은 가는 첫차를 기다리다 끝내 젖이 불어 주막으로 피한한 새댁의 흐른 젖에서는 김이 올랐다. 사족이 필요 없는 추억의 결정판이다. 아무리 귀가 잘려나갈 듯 추웠어도 그 시절 그 기억으로 돌아가면 얼어 죽어도 좋을 애틋한 그리움. 시인은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가을날’)라거나, “어두운 부뚜막과/ 생솔가지 매운 연기의/ 멀건 호박풀때의 저녁이/ 천천히 그 위로 내리곤 했다.”(‘매미’)라고 거듭 그 시절을 떠올린다.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비둘기호’).

그때는 몰랐지만 이젠 아니다. 시인이 배밀이로라도 끝내 고독하게 가고 싶은 지점은 안온한 이 땅의 환경과 그곳 주민들의 환한 미래일 터이다. 시인은 차라리 외친다. “슬프자, 실컷 슬퍼버리자/ 지자, 차라리/ 이기지 말아버리자”(‘불길한 저녁’)고. 진다고 지는 건 아니다. 제대로 지려는 마음이기에 ‘어린 당나귀’를 끝까지 안고 간다. 이번 시집에 ‘당나귀’ 같은 시는 한편도 없는데 시인에게 당나귀의 이미지는 “고집 세고 욕심 많고 자지만 큰 놈”이다. 아침이면 어디로 떠나고 없기를 바라지만 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놈이 “안타까운 한반도의 환경이자 애물단지처럼 사랑하는 시도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슬프지만 껴안을 수밖에 없는 당나귀, 이국종 난해시가 범람하는 시단의 애틋한 존재. 생은 짧아서 당나귀와 이별할 시간도 언젠가 오리니, 시인은 시로써 당부한다.

9년 만에 새 시집을 펴낸 김사인 시인.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임시직”이라면서 “사는 일의, 산다는 일의 그 원천적 임시계약직스러움의 무력함과 덧없음과 불안과 고독과 황당함에 대한 뼈저린 사무침이 우리를 노래하게, 한숨 쉬게, 슬프게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이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화양연화’)

김사인은 “어느날 갑자기 새날이 오리라고 바라지 않는다”면서 “가는 데까지 배밀이로 나아갈 뿐”이라고 ‘시인의 말’에 썼다. “지렁이처럼, 욕될 것도 자랑일 것도 더 이상 없다, 내게도 당나귀에게도”라고 이었다. 그냥 “모과나무 너머 파란 하늘이 고요하고 귀하다”면서.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