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는 함께 작업실을 꾸몄다. 테이블과 의자 등 작업용 가구는 누이가 디자인 설계를 하고 동생은 자신의 사진작업으로 외양을 입혔다. 이렇게 함께 만든 가구는 ‘크크르크득’ 상표로 시판도 된다. 한켠엔 작품 창고가 위치해 있고 그 위론 다락방을 만들어 언제라도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수다를 떨 수 있게 했다.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층계엔 여러가지 소품들이 사열을 하고 있다. 창조의 언덕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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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수동 공동작업실에서 나란히 선 김경란(오른쪽)·김도균 남매. 이들은 “성수동 지역이 오랜 세월 공장지대로 안정화돼 있어 안정감을 주는 것이 매력”이라며 “겉으론 거칠어 보이지만 부드러운 이들이 삶을 영위하는 곳”이라고 성수동 예찬론을 폈다. 새롭게 형성된 강남지역 등과 비교해 이런저런 잡음도 없고 사람들도 배타적이지 않다고 했다. |
실제로 누이는 명동 만화의 거리에 위치한 주차장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애니메이션과 어울리는 외관 아이디어 제안에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동생의 사진적 시각이 주효했다. 세운상가 재생프로젝트 콘셉트를 시각적으로 명확히 정리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생은 전시구성 등에서 누이의 조언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사진 등 순수미술은 실용적인 건축 입장에선 인문학 같은 것이다. 짓는 건축은 한정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다. 빛과 공간 조합의 새로운 방식의 영감은 순수미술에서 얻을 수 있다. 건축가들이 미술전시를 많이 보는 이유다.”
남매는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롱샹 성당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경험을 했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으로 건축공간에서의 빛의 안무가 주는 뭉클한 감동에 가슴을 적셨다.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의 미국작가 ‘제임스 터렐’관은 빛과 공간을 잘 빚은 작품이지만 어찌 보면 건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건축도 사진도 빛을 안무한다는 점에선 같다 할 수 있다.”
누이는 그동안 큰 건축프로젝트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지난해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협력적 주거 공동체’전에 얼굴을 내밀었다. 주거공간이 사적공간이라는 절대적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전시였다. 1인가구의 증가, 동호인 주택과 셰어하우스와 같은 다양한 주거형식에 대한 관심은 사적공간을 절대화하는 관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사적공간 형식인 서양의 ‘룸’과는 달리 한국의 ‘방’은 사적, 공적 프로그램을 모두 수용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캠핑마당, 공유주방, 텃밭, 운동실 등. 아파트 공간에 다원화된 공유공간 확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파주 예술인마을 헤이리 마스터플랜 프로젝트도 그의 손을 거쳤다. 건축 코디네이터로 참여하면서 대지의 본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감각을 최대한 끌어냈다.
한국 사진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동생은 2012년에 이미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독특한 방식의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홍승혜 미술작가, 사이건축 공동대표 이진오와 서대문 일광빌딩 공용공간 리뉴얼 작업에 참여했다. 소통은 카카오톡으로 이뤄졌고 건축을 중심으로 일이 진행됐다. 홍승혜는 건축가 이진오와 함께 은은한 존재감을 표출하는 정서적 공간을 창출했다. 공간에 숨겨진 기하학적 구성를 탐구하는 작업을 해온 동생은 공간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공간을 평면화시키고 시점을 압축하여 화면에 재구성해서 보여 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면으로 작업하지만 항상 공간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이 현실이 되는 것’을 꿈꿔온 미술가 홍승혜와 공간을 대상으로 작업하면서도 디테일과 질감에 민감한 건축가 이진오의 상호보완적 과정을 통해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동생 김도균은 다시 공간 안에 숨겨진 미적 구조를 찾아 이에 대한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 셈이다.
“작곡가 슈만은 교양 있는 음악가라면 라파엘로의 마돈나 그림을 연구해야 하고, 화가라면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서로 똑같은 이점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배우가 조각을 공부하면 동작의 틀이 잡힐 것이고, 조각가가 연극에 대해 탐구하다 보면 그의 작품은 배우와 같은 생명을 갖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 남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에 대한 생각’이 문뜩 뇌리를 스친다. ‘그림은 다른 세계들 간에 부딪히는 천둥 같은 충돌을 통해 신세계를 창조하려고 한다. 이 충돌로부터 탄생하는 신세계가 바로 작품이다’ 사회과학도였던 그는 비구상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현대사회는 지식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암흑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전문화가 가속화하면서 지식은 파편화되고 학문 간 교류는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종합적 이해력은 퇴보 일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오로지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재통합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 남매의 공동작업실도 그런 시각으로 봐주었으면 한다.”
한 분야의 창조적 사고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문을 여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지식의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신(新)르네상스인이 필요한 시대다.
글·사진=편완식 미술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