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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가야산 홍류동 계곡 석벽엔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한 고운 최치원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시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의 시에서 글자를 따와 정자 이름을 농산정으로 지었다. 합천군 제공 |
경남 합천 가야산을 여행하는 것은 신라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의 마지막 삶의 여정을 되짚어 보는 과정이다. 합천 가야산은 최치원의 마지막 숨결이 곳곳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이 되어 천상으로 날아갔다는 최치원 전설은 애절하게 여행객의 가슴을 울린다. 최치원의 말년은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구슬프다. 신라의 국운이 쇠하고 고려가 흥할 것을 예견한 최치원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고 전국을 떠돌며 은둔생활을 했다. 이에 언제 생을 마쳤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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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일출. |
최치원이 기거한 지 천 년이 흐른 지금 가야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애잔한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산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고즈넉함을 더하고 있다. 겨울 산의 매력을 가득 품고 있는 가야산에서 최치원을 만나려고 발걸음을 치인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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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상왕봉 설경. |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와 살던 곳으로 치원촌(致遠村)이라 하던 것이 치인촌이 되고 지금의 치인리가 됐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시작해 해인사 통제소까지 7㎞가량 이어진 해인사 소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최치원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소리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첫 명소가 멱도원(覓桃源)이다. 무릉도원을 상상하면서 멀리 가야산을 바라본다고 해서 이렇게 불리게 됐다. 최치원 역시 이곳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 산속 어딘가에서 무릉도원을 찾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해인사로 갈 수 있는 다리인 무릉교를 만나게 된다. 무릉교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가야산의 속풍경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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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정. |
눈으로는 가야산 풍경에, 귀로는 계곡 소리에 빠져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홍류동 계곡에 다다른다. 붉은 단풍이 물에 비쳐 붉게 흐르는 계곡이라 하여 홍류동으로 이름 지어졌다. 한겨울 흰 눈에 덮인 계곡과 한쪽에 서 있는 정자 농산정(籠山亭) 모습은 가히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농산정 건너편에는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던 최치원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시가 새겨진 석벽 ‘제시석(題詩石)’이 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첩첩이 쌓인 바위계곡을 굽이치며 온 산을 뒤흔드는 물소리에 지척에서도 사람들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다. 항시 어지러운 시비가 두려워 흐르는 물길로 산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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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에서 바라본 해인사. |
이 시를 ‘등선시(登仙詩)’ 라고도 한다. 최치원이 이 시를 쓴 다음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갔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고 신영복 교수는 ‘선경(仙境)을 묘사한 듯한 이 시에서 오히려 선경의 반대편에 서 있는 고운의 고뇌를 읽게 된다’며 ‘부패와 정쟁(狂奔疊石)으로 어지러운 신라 사회에서 개혁의지(人語)가 벽(是非)에 부딪쳐 좌절당한 지식인의 고독(籠山)과 고뇌(恐)가 배어 있다’고 평했다. 이 같은 최치원의 뜻을 잇고자 목은 이색, 점필제 김종직, 매월당 김시습, 만해 한용운 등 지식인들이 이 석벽을 찾았다. 농산정은 후세에 이 시의 끝 두 글자 ‘농산’을 따와 이름 붙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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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남산제일봉 |
홍류동 계곡의 풍경과 최치원의 고뇌를 뒤로하고 조금만 더 올라가 보면 또 다른 절경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신선이 남쪽을 향해 피리를 부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취적봉과 신선이 도끼로 찍어 만든 붓으로 먹물을 찍은 바위라는 체필암이다. 최치원이 가야산에서 신선이 됐다는 전설을 짐작하게 하는 경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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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겨울 전경 |
해인사에 도착해서도 최치원의 흔적은 뚜렷하다. 해인사 내 높이 3m의 길상탑(보물 1242호)에서는 최치원이 지은 ‘해인사 운양대 묘길상탑지’가 발견됐다. 탑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비용을 모아, 왜 지었는지를 기록한 탑지는 통일신라 후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해인사 경내 팔만대장경판고 옆에 위치한 학사대에서 최치원이 가야금을 뜯으면 소리를 듣고 학이 날아왔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학사대 옆 전나무에도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자랐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합천=이귀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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