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국격을 높인 두뇌 스포츠였다. 적어도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를 제패한 89년 9월부터는 그랬다. 결승 상대 녜웨이핑 9단은 중국이 자랑하는 ‘철의 수문장’이었지만 조훈현 앞에선 무력했다. 바둑 강국의 시대가 그렇게 열렸다. 일본에는 원래 밀리고, 신흥 세력 중국에도 뒤처지는 것으로 보이던 한국 전투바둑은 세계 최강으로 거듭났다. 가장 빛난 후속 스타는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 9단이다. 스승과 상반되는 두터운 기풍으로 세계 바둑계를 호령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세상은 ‘신산(神算)’으로 받들었다. 이창호와 한국 바둑을 기리는 신전을 짓고 경배를 한 것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
바둑에 앞서 인공지능을 상대한 것은 서양 장기인 체스다. 현대 정보이론 창시자인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수학자 클로드 섀넌이 체스 프로그래밍 논문을 낸 1950년부터 헤아리면 체스 고수들은 40년 넘게 컴퓨터 공격을 막아냈다. 체스가 결국 무너진 것은 97년이다.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세계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다. 이어 2011년에는 ‘왓슨’이 인간 퀴즈왕들을 물리쳤다.
바둑 방파제는 이번에 건재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알파고를 얕볼 계제는 아니다. 지난해 10월 유럽 챔피언 판후이를 5대 0으로 꺾었으니 수준급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구글 측이 50대 50의 승률을 점치는 것도 찜찜하다. 하지만 이세돌과 판후이는 같은 반열이 아니다. 유럽 챔피언을 넘어섰다고 세계 정상급까지 넘보는 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다.
바둑의 복잡성도 감안해야 한다. 체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10의 10승의 50승이라 계산한 수학자들이 있다. 디에고 라스킨 구트만 같은 학자는 “체스의 경우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더 많다”고 했다. 바둑은 그러나 전혀 다른 경지의 신천지다.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 차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체스는 전투, 바둑은 전쟁이다. 한마디로 비교 불가다. 이세돌은 최근 “한 판이라도 진다면 인간이 컴퓨터에 무너지는 신호탄이 된다”면서 5전 전승을 자신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렇게 돼야 한다.
3월 5번기의 최종 결과에 관계없이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도전장을 내밀 만큼 급속도로 진보한 것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작가 겸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정치소설 ‘탕크레드’를 썼다. 그 작중 인물인 콩스탄스 부인은 “우리 다음에 오는 존재는 훨씬 더 뛰어난 존재일 거예요. 어쩌면 날개가 달려 있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한다. 알파고가 과연 그런 부류일까.
물론 기술혁명이 아무리 대단해도 인류를 멸절하려 드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따위를 떠올리며 겁먹고 움츠러들 계제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공존 방식을 보다 진지하게 성찰할 시기는 충분히 된 모양이다. “향후 100년간 인류가 직면할 위협은 과학기술 발전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영국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경고도 신중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지난 1월 ‘4차 산업혁명의 이해’ 주제로 열렸던 다보스포럼 논의 내용도 새삼 곱씹을 일이다. 바둑은 지금, 인간 성찰을 요구하는 가시방석이다.
이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