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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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만 더…” 의무병의 기도, 기적을 만들다

멜 깁슨, 10년 만에 메가폰 잡은 ‘핵소 고지’

'핵소 고지'는 아군이 후퇴한 뒤에도 홀로 남아 75명의 부상병을 구한 의무병 데즈먼드 도스의 실화를 그린 영화다. 판씨네마(주) 제공
“주여! 한 명만 더 구하게 하소서. ··· 한 명만 더 구하게 하소서 ···”

집념이 만들어낸 초인적 상황에서 마침내 데즈먼드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

멜 깁슨이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핵소 고지’는 2차 세계대전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오키나와 핵소 고지에서 아군이 후퇴한 뒤에도 홀로 남아 75명의 부상병을 구한 의무병 데즈먼드 도스의 실화를 스크린에 구현한 영화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 싶습니다.”

비폭력주의자 데즈먼드(앤드루 가필드)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참혹한 전쟁으로부터 인명을 지키기 위해 의무병으로 자진 입대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총을 들 수 없다는 ‘양심’에 따라 필수 훈련 중 하나인 소총 파지법마저 거부하자 기강과 단합을 흐린다는 이유로 군 상부는 그를 전역시키려 하고 동료들은 겁쟁이라며 조롱과 폭력을 가한다. 급기야 군사재판까지 받게 되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데즈먼드는 결국 오키나와 전투에 아무런 무기 없이 의무병으로 참전할 것을 명 받는다

 ‘아포칼립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브레이브 하트’ 등 자신만의 탁월한 연출력으로 드라마를 펼쳐내며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를 석권한 멜 깁슨은 갖가지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기에, 잊혀졌던 진정한 영웅을 조명해낸다. 처음부터 부여받은 초능력으로 지구를 구하는 만화 속 영웅보다는 외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극히 평범한 개인이 실로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

데즈먼드의 굳은 신념과 용기를 섬세하게 파헤치는 동시에 치열했던 고지 전투를 리얼하면서도 서사적으로 담아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을 부각시키기 위해 극 초반 가족관계와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그로 인해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빛을 발하도록 이끌어간다.

특히 멜 깁슨은 이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채찍질에 뜯겨나가는 예수의 살점들을 보여주었듯, 영화 속 전투 장면을 누구에게든 ‘최악의 상황’으로 느껴지게끔 담아낸다. 전쟁이 지닌 ‘잔혹함’, 그 본질에 집중한다.

데즈먼드가 속한 중대는 지난밤 고지에서 전투를 치르고 내려오는 아군의 행렬과 마주친다. 트럭 위에 마치 나무토막처럼 적재된 시신들과 넋이 나가고 지친 패잔병들의 모습을 통해 ‘게임’ 속이 아닌 ‘현실’ 속 전쟁을 보여준다.

감독은 상영관 내 객석을 통째로 들어다 포탄과 탄환이 빗발치는 핵소 고지의 전장 한가운데 내려놓는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근거리 총격전이 충격적이다. 박격포탄과 수류탄의 폭발음에 이어 살상 위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땅이 패이고 흙이 튀고나면 순식간에 하반신만 남기고 사라진 전우와 여기저기 나뒹구는 팔, 다리, 몸통 일부 그리고 쏟아진 내장을 목도하게 된다. 고개를 들면 날아온 탄환이 바로 옆 아군 병사의 얼굴을 관통한다.

화염방사기가 내뿜는 강렬한 불줄기에 휩싸여 순식간에 타버리는 일본군의 고통도 지켜볼 수 있다. 격전을 치른 뒤 갖는 잠깐의 휴식 때는 시체들을 뜯어먹는 쥐 떼들과 만나게 된다.

이 같은 지옥의 전장에서 데즈먼드는 야음을 타고 다람쥐처럼 뛰다니며 부상한 동료들을 구한다.

일본군의 수색대를 피해 적의 지하 진지에 숨어든 데즈먼드가 이리저리 쫓기는 장면은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의무병의 활약을 이처럼 입체적으로 그린 전쟁 영화는 처음이다.

멜 깁슨은 “실존 인물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는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에게 영향을 미친 주변 사람을 잘 그려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데즈먼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 톰 도스 역을 연기파 배우 휴고 위빙에게 맡겼다. 가히 ‘신의 한 수’라 할 만한 캐스팅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며 아들의 입대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곧장 관객의 가슴으로 전한다.

극장에 불이 켜지기 전 영화는 생전의 데즈먼드 도스를 소개한다. 

핵소 고지의 격렬한 전투에서 그는 팔이 골절되고 다리에 수류탄 파편이 박히는 등 심각한 부상을 당한 상태로도 홀로 100여명의 부상자 가운데 75명의 생명을 구해냈다. 미국에서 군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 ‘명예의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데즈먼드 도스는 겸손하게 말했다.

“진짜 영웅들은 그곳에 묻혀 있습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