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범종 전문가로 유명한 최응천(사진)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우리나라 범종의 최고 걸작품인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에 얽힌 비밀을 풀어놓았다. “우리나라 불교의 범종 형태와 울림 소리는 세계 으뜸이다. 밀랍 주조 기법이어서 두께가 얇아 울림이 넓고 깊다. 바깥 문양도 섬세하게 양각해 당대 상황을 전하는 최고의 금석문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종루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 바깥 표면에는 1000여 자의 문장이 돋을새김돼 있어 주조 당시 통일신라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불교신문 제공 |
최 교수에 따르면 성덕대왕 신종은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황금기인 8세기 무렵 경덕왕(742∼765) 당시 제작에 들어가 혜공왕 때인 771년 완성됐다. 경덕왕은 부친 성덕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효 사상을 높이기 위해 범종 제작을 시작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할 당시 최고의 과학, 건축, 조각술이 동원됐다. 범종 주조는 국가적 대사였다.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인 12만근이라는 대량의 구리가 쓰였고, 종의 무게만도 18.9t에 달한다. 높이 3.66m, 구경 2.27m로 국내 범종 가운데 가장 크다.
범종 표면에 돋을새김(양각)한 1000여 자의 문장도 유명하다.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최 교수는 “명문을 보면 종을 높이 달아 일승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원음이란 석가의 설법음을 가리킨다”면서 “부처의 설법을 신종의 소리를 통해 깨닫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풀이했다. 아울러 신라의 품계와 지도층 인사들의 이름, 문화, 습속 등이 빼곡히 새겨져 당시 문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최 교수는 신종의 별칭으로 전해지는 에밀레종의 설화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종을 주조할 때 쇳물에 순수한 어린이를 넣었다는 인신공양(人身供養) 설화가 그것이다. 최 교수는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면서 “범종의 궁극적인 목적이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심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인신공양 설화는 뜬구름 같은 얘기”라고 지적했다. 실제 성덕대왕신종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먼저 제작된(725년) 오대산 상원사 범종(국보 제36호)과 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 주종이고 미량의 납과 아연,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돼 있었다고 한다. 인신공양을 했을 경우 응당 나왔을 인 성분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 주조 당시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을 경우 기술적으로 종이 깨져 완성할 수 없다. 따라서 에밀레종 설화는 전혀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것.
최응천 동국대 교수. |
최 교수는 “조선 후기 유림의 세력이 높았던 경주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풀이했다. 최 교수는 “부처의 말씀 같은 종소리를 통해 민생을 제도한다는 신종의 참뜻을 성덕대왕신종은 가장 잘 표현한다”면서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은 왜곡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범종에 얽힌 얘기도 다양하다. 1975년 종을 매달고 있는 상부의 철고리를 교체하기 위해 포항제철에서 새 철고리를 특별 제작했다. 그런데 종을 달기 전 실험해보니 새 철고리가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원래의 철고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8세기 무렵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 교수는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맑고 웅장한 소리는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주는 천상의 소리”라면서 “신종이 지닌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대”라고 풀이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